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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 교회개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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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 교회 개발
맹용길 목사(장신대 교수)
주최측으로부터 "21세기와 교회 개발"이라는 제목이 주어졌을 때는 상당히 어렵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발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기엔 너무 벅
차고 그 의미가 우리에게 확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제목은 우리들이 언젠가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제목이고 또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많이 논의했기 때문
에 논의된 내용들을 의식하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또 개발 중에서도 교회 개발
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들어가는 말
우선 말씀드리기 전에 머릿속에 꼭 담아 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왜 21세기를 말하면서 교회 개발과 연관시키는가? 도대체 21세기와 교회 개
발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21세기는 시간적인 문제이고, 교
회 개발은 시간과는 상관없는 우리 문제인데 왜 이 시점에서 교회가 개발을 들고 나
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교회 개발의 의미 혹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내용입니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 해야만 교회가 21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즉, 교회 생
존의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여러 가지 징조로 보았을 때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느
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살아남
기 위해서는 교회 개발이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21세기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도전에는 어
떠한 것들이 있겠습니까?
1. 21세기로 가는 길목의 도전들
(1)세계화 우선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 오는 단어는 아마 세계화일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통용 되는 측면은 경
제적인 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우리 나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용되던 말인데 우리
나라 정부도 거기에 발맞춰 단어를 바꾸어 세계화라는 말로 행정쇄신, 교육혁신, 행
정규제 완화, 의식개혁 등 다방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고 계시겠지만 꼭 아셔야 될 것이 교육개혁입니다 얼마 전에
발표되어 아직 정리도 안 되어 논의도 많습니다만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부터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표된 교육개혁안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교육개혁을 한
사람들 머릿속에는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어떻게 하면 대학
입시 문제를 해결할까'라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자라나고 있
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21세기를 준비하는 교육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첫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로는 지금까지 생각한 것과는 달리 교사와 학부형에게 정직성을 요구하는 교
육을 떠맡기는 엄청난 과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치맛바람을 없애기 위해 과외공부까
지 없앴는데 이제는 아이들 성적을 올리기 위한 치맛바람이 얼마만큼 불어닥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지 않습니다 물론 그 나라도 대학
입학을 위한 학력고사(S.A.T)는 있습니다. S.A.T 성적은 각 고등학교의 성적이 됩니
다. 그래서 어느 학교의 몇 등은 하버드 대학에 갈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다
압니다. 그렇다고 몇몇 학교 출신만 대학에 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여러 학교에
서 다양한 성적으로 갑니다.
이번에 제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경기도에 있는 어느 상업 학교에
갔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생이 천 명인데 한 명도 취직이 안 되었다는 것입
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취업 담당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사회 봉사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회 봉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회를 위한 봉사로 제
일 먼저 물은 것이 헌혈 여부랍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학생 중에 헌혈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관여하고 있는 시설이 있는데 정부에서 그 곳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자 대
기업에서도 많이 답사를 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삼성이 여러 군데를 답사하고 최
종적으로 그곳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일 주일 인가 한 달에 한 번씩 간부를 포함한
직원 15명씩 봉사하러 옵니다. 요즘은 기업도 상당히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지금 우
리 나라의 추세가 그렇게 변하고 있는데 교육은 그것을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
습니다. 오직 대학 입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업도 문제가 있긴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기업에서 직원을 뽑
아 놓고도 학력에 따라 차등을 둔다고 합니다 기술자를 우위에 둔다고 하지만 실제
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기술자들 이 기술은 정말 좋은데 교양이 부족하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크게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규적으로 공부를 하신 분들이 실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교양은 떨어지는 위험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부는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고, 양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교양 있게 대하면 되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무한 경쟁
무한 경쟁은 지금까지의 경쟁과는 달리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게임입니다. 올림픽
게임도 규칙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한 경쟁은 규칙이 없습니다.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고, 방법도 무슨 수를 써도 괜찮습니다. 다만 경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경쟁 입장입니다.
(3) 인간 중심
인간 중심이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것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에 대한 도전입니다. 인간 중심 문화는 인간의 역사에 교훈을 주는 듯하면서도 교
회, 즉 하나님 중심 사상을 멀리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
여 빚어낸 자연 환경의 훼손도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에 대해 걱정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4) 사고의 명료화와 다양화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정체된 사고만 요구되어져 왔습니
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21세기는 창의적이며 명확한 사고, 수평적, 통합적인 사
고가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이제까지 해 오던 방식에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해지는 데 노력했
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생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생각을 그
냥 답습한 것은 그 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우리의 사고가 새롭게 변화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길을 찾기 어
렵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것보다는 보다 교회를 살리는 쪽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사고방식이 교역자들에게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
러한 사고들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겸손하라' '봉사하라' 등등의 말을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목사님에게는 아무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마치 대통령이 어디를 가면 모든 교통을 중지시켜 놓고 혼자 가는
것처럼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비교적 교회를 많이 돌아다니고 교회 행사에도 많이 참여해 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설교란 남을 위한 설교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여야 성도들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자기가 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목회
자라면 교인들이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문제삼지 않습니다. 일단 저는 그렇게 생
각하기 때문에 사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5)행위의 요청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 신뢰를 주는 행동,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
하는데 쉽게 말해 목사님이 무슨 일을 하든 교인들은 틀림 없다고 믿는 그 행위를
말합니다 사실 저 사람이 무슨 뜻으로 저런 행동을 할까 의심하게 하거나 혹은 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 다음에는 무엇 무엇이 있겠다는 추측을 하게 하는 목사님은
정치하는 목사입니다. 교계에도 그런 분이 많은데 그들은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사하거나 정치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아마 천국 가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력을 휘두를지 모르지만 지옥에서나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야 그 사람이 미울지라도 그 사람이 한 말은 틀림없어서 콩이라고 하면 콩으로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제대로 목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21세기에는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지금 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저 사람을 불러서 쓸 수밖에 없
다.'라는 말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말하고 행동이 다르다 혹은
저 사람은 말뿐이고 행동이 따르지 못한다.' 등등 그런 말을 들으면 곤란합니다.
회의할 때 보면 꼭 늦게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습관적인 것으로 30
분 늦는 사람은 30분 늦고, 5분 늦는 사람은 꼭 5분 늦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의
에만 늦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늦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상대를 하지 않
으려고 합니다. 앞에서는 웃지만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을 안 지키
니까 신뢰를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집사님이 있다고 합시다. 심방 갈 때 만날 약속을
9시에 해 놓고 9시 반에 나타나면 심방 받을 집은 많이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 사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을 낳게 됩니다.
9시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안 나왔으면 목사님 혼자 갑니다. 몇 번만 그렇게 하면
꼼짝없이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전체 신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 교회 하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님은 일을 진행하는
분입니다. 그런 것은 괴팍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매사에 시간을 따집니다. 옛날에는 1분, 2분 따졌으나 지금은 1초, 십분의
1초 등으로 따집니다. 마라톤을 비롯한 육상 경기 종목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현대는 시간이 승패를 가름합니다. 1분 늦은 걸 갖고 뭘 그러냐고 하지만
1분이 인생에 있어서 승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곳에 오다가 너무 막혀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본래 휴일은
차가 막히니까 그것을 감안해서 평소 걸리는 시간보다 두 배 이상 걸리려니 생각하
고 일찍 출발했습니다. 전 넉넉하게 올 수 있으려니 했는데 평소 시간보다 세 배나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저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미리 나서기 때문에 늦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상습적으로 늦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 주시기 바랍
니다.
행위에 있어서 '공감'이라는 말을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라
는 말은 '감정 이입'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의 감정
까지 정확하게 이해해서 그 사람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마음
21세기신학교육과목회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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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향과 내향 중심에서 외향 중심으로의 교육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
(inreach) 과 외향(outreach)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이유이
다. 이것은 예배와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
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 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지금까
지의 한국교회는 상향을 강조하여 교회의 본질에는 충실하였으나 외향에는 상대적
소홀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와는 별개의 기관이 되었고 교회가 상향 을
강조하는 동안 사회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하였으나 이제는 사회가 교
회를 외면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은 실제적 사명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어야 하며 이러한 교육이 미래사회에 적응력을 회복하게 할 것이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 (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
고 베이비 거부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 붐 세대 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
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3) 신학교육 기관의 네트워크
블록(block)이 발달하고 있는 시대, 전자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의 교환과 사업
이 활성 화될 미래를 위하여 신학교육도 네트워크 형성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제3
의 물결의 증후군인 에 큐메니즘의 발달은 신학대학교 간의 네트워크를 더욱 활발하
게 할 것이고 긴밀한 네트워크는 전 문 목회자의 양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신학
교육기관의 네트워크의 양상은 대개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첫째, 교단 신학기관과
의 네트워크이다. 지금도 한국신학대학협의회(KAATS)가 있지만 미래의 네트워크의
수준은 협의체로서가 아니라 정보, 학점, 학생, 교수간의 교류가 더욱 긴밀할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경쟁적 대상이 아니라 협력과 공동창조의 파트
너로서 미래사회에 적합한 전문 목회자 양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는 신학대학교 뿐만 아니라 일반 대학교와도 가능할 것이다. 둘째,
본 교단 내의 신학교육 기관간의 네트워크이다. 교단 내의 신학대학교들의 질적 향
상은 신학교육 기관 간의 경쟁적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과 지방색 의 노출과 나아가
서 교단분렬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있다. 지방화시대를 맞이하여 지방 신학교 육
기관의 발전은 바람직한 것이나 이러한 우려를 사전에 배제하기 위하여 네트워크를
통하여 신 학교육의 발전적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각 신학대학교를
전문화하여 7신학대학교가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기독교와 문화, 실천신
학, 선교학, 기독교교육학, 교회음악, 기독교 사회복지학 등으로 전문화하여 학교
선택의 기준을 지방에서 전공으로 전환하여 준다면 네트워크를 통하여 이런 우려를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세계 신학교육 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한국 신학의
세계화와 발전을 위하여 세계적 신학교육 기관과의 유기적 네트워크의 형성은 필연
적일 것이다. 네트워크는 자매기관의 차원이 아니라 정보와 교환에 있어서 동질적
파트너를 의미한다.
넷째, 신학교육 기관과 교회와의 네트워크이다. 미래교회는 신학과 목회의 긴밀한
관계 를 요청할 것이고 이러한 요청은 네트워크를 통하여 충족될 것이다. 신학대학
교의 도서관은 CD 네트를 통하여 목회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고 교회
는 신학교육 기관이 필요로 하 는 협조를 네트워크를 통하여 제공할 수 있을 것이
다.
(4) 목회전문화를 위한 전문성 교육
미래사회는 극도로 발전하는 전문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육은 비전문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신
학을 전공한 목회자 가 수업연한에 비하여 가장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 회자의 전문화 교육은 전문직으로서의 목회를 인
정받게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목회를 위 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
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
보다는 강조될 수 밖에 없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 성
이 요구되는 이때에 한국의 신학교육은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
사이고 목 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 과' 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런 근시안적 전세대적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나아가서 한국신학은
미래목회를 위한 전문화를 위하여 전문목회를 위한 부전공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개
발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의 '선교학 부 전공'과 같은 부
전공을 사회복지학, 교육학, 상담학, 행정학, 영성학, 여성학, 음악 등으로 확대하
여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하고 자신의 전문성
을 통하여 목 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5) 한국신학의 세계화 작업
11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적 목회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세계적 신학자는 상대적으로 배출하지 못하였다. 세계적 신학자가 없는 교회
에서 세계적 목회자 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
회성장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교회 이지만 신학과 목회의 내용에 있어서는 세계적이
라고 하기는 부끄러움이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 이하여 한국신학은 세계적 신학으
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교리적이고 교파지향적인 종래의
신학교육이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칼 지향적인 미래의신학교육으로 전환되 어야 하
며, 성서적-역사적 지향성의 종래의 신학교육은 성서적-상황적 지향성의 미래의 신
학교육 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성서적-본문 비평적 분석의 종래의 신학교육은 사회,
인류학적 분석의 미 래의 신학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세계화란 세계의 것을 수
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이듯이 한국 신학을 세계적 신학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 한국신학의 과제일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로 기록된 성서는 헬라적 사유를
가진 서구인들 보다 히브리적 사유를 가진 동양인들에게 더 익숙하며 더 유능한 신
학자를 배출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에 한국신학의 세계화의 가능성이 있다. 특
히 한국교회의 소외경험과 해방경험은 한국신학의 개별성을 세계화할 수 있는 신학
적 경험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역사적 경험과 한국교회의 성장의 경험과 한국적
문화의 이해 등은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소중한 자료들이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입시 성직 지원자의 수가 해마다 줄고
지원자 의 질도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10여년간 성직 지원자는 해마다 증가하
여 최고의 질과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990년 중반에 들어오면서 성직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지원자도 감소 하였으며 지원자의 질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쇠퇴하게 되면 성직 지원자의 수와 질 이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는 교회쇠퇴
가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개신교의 경우 연간 1만명 가량의 예비 목
사를 배출하고 있으나 목사 지원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인력이 입학하는 4년제 정규
대학 신학과의 경우 평균 내신성적이 6-8등급이라고 한다. 더구나 학력 비인정 신학
교 육기관의 입학생의 수준은 4년제 보다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러한 신학교
육 지원자의 질적 양적 하락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한 요소이다. 이미
기업에서는 세계화 시대의 생존을 위하여 '산학협력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교
회도 세계화 시대를 위한 생존을 위하여 '교학 협력체계'를 형성하여야 한다. 신학
과 목회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목회자는 신학자이어야 하고, 신학자는 목회자이어야
하므로 교회와 신학은 미래신학과 미래교회를 위하여 상호 보완적 연계성 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21세기신학교육과목회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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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류공동체의 보편화
미래사회는 인류공동체가 보편화되는 우주적 사회이다. 장거리 통신의 발달로 좁
아진 세 계는 이미 생활양식의 유사성이 증대되고 있다. 세계화의 동인 가운데 하나
인 여행은 세계로 하 여금 더욱 좁아지게 하고 있다. 일반적 통계에 의하면 현재 세
계적으로 여행업 종사자의 수는 2 억1천2백만명이나 2015년이 되면 전세계 인구의
10%가 여행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다. 현재의 세계인구는 57억이지만
2025년에는 87억이 될 것이고 세계은행의 추계로는 2050년에 는 100억내지 110억의
인구가 지구에 살게 될 것이다. 대도시와 위성도시의 발달 그리고 고속전 철의 발달
은 미래교회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인구가 오늘
날 만큼 이동률이 심하고 이직률이 심한 때는 없었다. 미래형 인간들에게는 일정한
고향이나 주거가 없다. 미래형 인간들에게는 자기가 사는 곳이 곧 집이다.
잦은 이사와 여행은 사회를 기존의 사회 현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유목민적 사고의
사회로 탈바꿈하고 동공화를 촉진하게 할 것이다. 이러 한 이동성(mobility)의 발달
은 교회로 하여금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하게 하고 새로운 목회구 조를 요청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2. 21세기 목회의 예상되는 특징들
토플러(Alvin Toffler)의 '제3의 물결'에 의하면 농업혁명인 제1의 물결은 이미
퇴조하였 으며, 공업화인 제2의 물결은 계속 확산되고 있으며, 탈공업화인 제3의 물
결은 선진공업국에 의하 여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메이너드(Herman
Maynard)와 머턴스(Susan Mehrtens)는 '제4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이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고 하였다. 제2의 물결시대는 분리와 경 쟁을 그 기조로 하였으며 제3의
물결시대는 균형과 협력시대인데 비하여 제4의 물결시대는 통합 과 공동창조의 시대
라고 한다.
한국 기독교의 제1의 물결은 이미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지나갔으며 제2의 물결
은 아 직도 확산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제2의 물결의 끝자락에서 제3의 물결로
진입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제3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로의 이동은 급속
하게 진행될 것이다. 제4의 물결 은 하나의 공동창조를 그 기조로 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생존적 자구수단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통하여 21
세기 목회의 예상되는 특징들을 살펴본다.
(1) 개교회주의의 퇴조와 에큐메니즘의 발달
미래의 성격 특히 일회성의 발달과 제3의 물결 이후의 증후군은 개교회주의를 퇴
조시키 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할 것이다. 경쟁과 분리의 세계관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대형교회를 양산하였으며 대형교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소유의 개념보다 대여의 개념이 발달할 미래사회에서는 제3의 물결의
능후군과 일치되어 개교회주의를 퇴조하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일회
성이란 사회현상을 넘어서 미래형 인간의 사고형태가 될 것이며 이러한 사고형태는
교회에 대한 소유개념보다 편의개념이 발달하게 될 것이다. 개교회주 의를 퇴조시킬
또하나의 미래현상은 이동성이다. 이동성의 발달은 지역교회를 퇴조하게 하고 거 리
개념을 희박하게 할 것이다. 이것 외에도 내부적 교회개혁의 목소리는 개교회주의를
퇴조시키 는 압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3의 물결 사조는 에큐메니칼 운
동이 발달하고 연합을 기조로 하는 교회운동을 활성화하게 될 것이다.
(2) 평신도사역의 극대화
전세대의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출현 보다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
을 통한 교회성장을 미래교회는 도모하게 될 것이다. 메타교회는 소그룹을 통한 교
회활동을 강조하고 목 회자는 평신도 훈련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메타교회는 동화 (assimilation), 훈련, 목회적 돌봄 그리고 전도의
센터로서의 기능을 하는 네트워크에 기초하고 있는 교회이다. 메타교회는 주일예배
에 모이지만 주일 아침의 모임을 통하여 전체 목회를 달성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
는다. 반면에 가정, 사무실, 그리고 다른 만남의 장소로 흩어지게 한다
(decentralize). 대부분의 목회는 소그룹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끌어지기
때문에 소수의 목회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메타교회는 목회자의 역할 보다
평신도의 역할이 중심이 된 교회이며 평신도 훈련을 강조한다. 특별히 평신도는 미
래교회에서
성직자의 동역자로서의 관계와 개념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역자"의
신학적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바울은 동역자란 개념을 포괄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3) 조직교회에 대한 반대와 영성의 부활
미래교회의 교인은 영성에 대한 관심은 증대되나 조직교회의 구조에 대한 싫증을
느끼고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할 것이다. 종교적 조직이란 대체로 목표지향(goal
orientattion)으로 시작하 여 업무지향(task orientation)으로 전락하고 마침내 밑
바닥에서 통제지향(control orientation)으로 타락한다.
미래사회는 인간을 조직 보다는 개인의 일에 묶어둔다. 재택산업과 화상회의가 발
달하 고 출근보다 근무라는 의식이, 통근 보다 통신이라는 의식이 발달할 미래인에
게는 교회라고 하 는 통제지향의 조직은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할 것이다. 미래교
인들이 새로운 교회를 찾는 근본 목적은 그들의 자녀를 위한 프로그램 때문일 것이
다. 반면에 미래교회의 교인들은 영성에 대한 관심은 고조될 것이다. 흔히 기독교를
예언자적 종교(prophetic religion)임과 동시에 영성적 종교 (spiritual religion)
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언자적 종교로서 예언자적 기능과 영성적 종교 로
서 영성적 기능을 동시에 포함한다.
교회사가들은 유럽교회들의 쇠퇴 원인을 교회가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치게 치중했
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한국교회가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것은 영성적 기능에
만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두 기능 사이
의 균형은 미래교회의 건전한 성장에 중요한 과제이다.
(4) 선교의 통전적 이해와 디아코니아의 발달
미래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
다. 한 국교회는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이동의 현상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의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이라는 제한
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사회에서 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전환
으로 모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선교의 개 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
서 사회참여라는 진보적 개념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 가
운데 가장 뚜렷하게 부각될 관심사는 디아코니아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남은 일이 있다면 디아코니아일 것이고 미래사회의 변동은 교회로 하여금 그
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공할 것이다.
미래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 야 하는가?"라는 개혁주의의
물음에 충실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5) 교회 마케팅의 발달
미래의 교회는 마치 사업가가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게 마케팅하는 것처럼 교회가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성경에 배치되는 것 외에는 신자들의 요구에 따르게 될
것이다. 마케팅이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함께 만족할 수 있도록 관련활동을 조정
하는 것이며 교회 마케팅이란 비지 니스와 사역 두가지를 통하여 교회가 목표로 삼
고 있는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며 그들의 영적, 사회적, 정서적, 육체적 필요
를 충족시킴으로써 교회의 사역 목표를 이루려는 것이다. 교회 마케팅은 소비자의
취향과 기회에 직접 호소하는 판매전략이기 때문에 치밀하고 전문적인 계획을 요구
한다. 교회 마케팅은 흔히 비판하듯이 교회의 상업화나 본질의 희석이 아니라 교회
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다. 교회 마케팅이 기대하는 것은 미래
사회 속에서 발달하는 기 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매력에 맞서 경
쟁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래의 소비자들 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다. 이러한 시도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한국교 회의 현실적 과제로 부각
될 것이다.
3. 21세기 목회를 위한 신학교육
지난 세기 까지의 한국신학은 교역자 양성이라는 폐쇄적 의미밖에 가지지 못하였
다. 그 래서 신학이란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으로 좁은 의미만을 부여하
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신학이 사회변동에 적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
하여 애쓰고 있으며 이러한 자구적 노력은 신학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사고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다. 거센 물결처 험 밀려오는 미래현상을 바라보면서
시대적 긴급성 가운데서 한국신학은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신학이야 말로 사회
를 알고 사회를 안고 해야 하는 학문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한국신학은 세계
안의 신학, 세계를 위한 신학, 세계와 더불어 가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 로
신학은 세계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며 세계화를 수용할 수 있는 포괄적 교육이 되어
야 할 것이 다. 한국신학은 이제 한국이나 아시아라는 좁은 궤도를 벗어나서 세계라
는 넓은 궤도로의 진입을 서둘러야 하며 그렇게 해야 세계화에 걸맞는 미래교회 지
도자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한국교회의 목회구조란 심방과 새벽기도라는 교회성장에 그 초점이 맞추어
져 있 었으며 교회구조도 구역조직이 중심이 된 교회성장 구조였다. 물론 이러한 목
회구조가 경험적 소산이며 필요에 의한 요청이었만 미래목회는 이러한 목회구조만
가지고는 미래사회에서 적응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는 이러한 목회구조 자체를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목 회 패
러다임을 무용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속히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이
이루어 져야 하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혁을 신학교육은 제공하여야 한다.
미래사회에 발달하는 임시성과 이동성은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을 무용하게 만들고
새로 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변화될 미래현상은 목회현장 뿐만 아니라
신학교육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므로 새로운 천년 시대에 나타날 지
배적 현상을 우선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전망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몇가지
미래를 준비하는 신학교육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일반적 미래교육을 위한 교과목의 요청
현재 신학대학교의 피교육자들은 21세기를 위한 목회자들이다. 기존의 목회 패러
다임만을 가지고는 미래사회에서 적응력을 상실하고 낙후될 수 밖에 없고 미래충격
을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충격의 피해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한 신학
교육은 일반적 미래교육을 위한 교과목이 설정되어야 하고 과감한 커리큘럼의 변화
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리신학과 응용신학의 균형도 개선되어야 실천력
과 적응력을 갗춘 목회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를 위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신학대학교에서는 영어와 제2외국어, 컴퓨터, 통계학, 환 경과 윤
리, 영성훈련, 교차 문화교육, 마케팅, 여성신학과 여교역자 양성, 목회실습 강화,
사회문제 등과 같은 신학교육의 교과목들이 요청된다고 김영일교수는 제안한다. 동
시에 사이버 시대에 발 생할 다양한 문화의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신학적
발전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21세기신학교육과목회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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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학교육과 목회"
들어가는 말
천년을 의미하는 '밀레니움(Millennium)'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인류의 황금시대를
의미하였으며 신학적 관점에서의 밀레니움은 영광스러운 지상의 왕국을 의미하며 최
종적 승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낙관적 미래론자들은 2000년대를 유토피아를
지상에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부정적 미래가 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
피아의 반대개념인 디스토피아(dystopia)로 가까워질 것이라 고 한다. 1993년 1월에
조사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미래관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경제, 정치 등 한 국의 외
부상황은 호전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기대이며 전망이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변동
에 따 른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는 조금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자가 74.3%로, 큰 차이
가 없을 것이라는 응답자가 16.83%, 그리고 매우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자가 1.30%로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4.55% 와 매우 나아질 것이라는 3.30%에 비하여 절대적 우세
였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일반적 미래전망 도 어두운 편이라는 결과이다. 이것은
과학이나 정치, 경제의 발달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 한다는 단적인 지적이
다. 미래사회에서 인간의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한 신학과 교회의 역할의 증 대가 필
연적일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미래라고 하는 시간은 예측을
불허하 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며 탈냉전과 함께 시작된 국가분렬로 세계는 점점 자국
이기주의와 민족분리 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원심적 분리와 더불어 구심적 통
합이 불가피하며 세계를 하나로 묶 는 여러 경제불럭을 위시한 집단체제들이 우후죽
순처럼 형성되고 있다.
탈냉전과 함께 이데올로 기는 종식이 되고 세계는 정신적 공백 속에 빠지게 될 것
이다. 이러한 미래세계는 21세기의 세계 가 향해야 할 향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렬과 통합의 이중구조, 이데올로기의 종식과 세계 방향성의 상실이 우리가
목회해야 할 21세기라는 미래사회이다.
한국교회의 목회구조는 지난 세기 동안의 경험적 소산이다. 한국사회의 특성과 특
히 교회성장이란 대명제로 세워진 성장형태로 만들어진 목회구조가 지금까지 교회를
구조화하였다. 그러나 미래목회자들은 미래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현재의 목회구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먼저 눈을 떠야 한다. 사회변동에 따른 미래세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형태로는 효율적으로 만 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회
구조를 가지고 미래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교회가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목회자는 토플러(Alvin Toffler)의 말대로 미래충격에 걸릴 것 이며 목회의
방향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필연적으로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Paradigm shift)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교회성장학자 칼 조지(Carl George)는 그의 저서들에서 미래교회를 '메타
교회 (Meta-church)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메타교회란 '전환기의 교회', '돌
아서는 교회', '되어 가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메타교회란 메가교회
(Mega-church)가 아니며 모든 미래적 구조를 지향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메타교회의
조직적 원리는 교회의 크기에 관계없이 질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메타교회의 사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인들을 어떻게 연관성을 가지게 할까
하는 새로운 환상을 보여주는 일을 강조한다. 특별히 미래교회가 유의해야 할 것은
메타교회의 강조 점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관계와 원리라는 사실이며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1. 21세기의 특징적 추세
(1) 세계화와 지방화의 시대
세계화란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미래어이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가는 과정과 현상을 의미한다. 이른바 미래현상으로 불리우는
3T 즉 교통, 장거리 통신, 관광은 전 세계 인류의 생활양식과 문화이해를 공유하게
하는 세계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 다. 그러나 `세계화'란 용어는 최근에 와서 일반화
되었지만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세계화를 선 언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명령도 복음의 세계화에 대한 강한 명령으로 나타난다. 구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의 지방화 혹은 지역화 작업도 급속도로 확신되고 있으며 현재 185개국
인 유엔의 가입국이 21세기에는 300내지 1000개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
하게 되었다. 세계화의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같은 세계이다. 세계는 경제적으로
나 정치적으로 하나 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모순과 패러독스 속에서 발전적인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도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미시구조에 관한 소립자 물리학이 전체로 서의 우주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우
주학에 합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사한 정치적 경제적 현상을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글로벌 패러독스(Global Paradox)라고 부른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기
업은 기업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게 하며 새로운 부족주의
(tribalism)를 탄생 시켜 동질성의 체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화와 지방화는 세계의 이중구조가 아니라 하나이며 세계화와 신토불이도 이중구조나
갈등관계가 아니라 하나이다.
(2) 신세대와 미래형인간
우리 주변의 상황변화는 상당한 미래형 증후군을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신세대의 출현이다. 신세대는 우선 탈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에세 산다.
흔히 X세대라고 불 리우는 신세대는 새로운 소비형태와 문화형태를 창조한 이들이
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인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컴퓨터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서 신세대를 의미 한다. 그들은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의 소유자이며 스스로 차별화를 부르짖는 별세대이 다. 흔히 신세대의 특
징을 PANTS 신드롬이라고 한다. 신세대는 개인적이며(personal), 흥미본위 로 살며
(amusement),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natural), 성별구분이 모호하며
(trans-border), 극단 적 자기사랑으로 살기를 원한다(self-loving).
(3) 가속적 변화의 시대
미래사회의 가장 뚜렷한 사회변동의 현상은 속도감의 변화이다. 이러한 역사변화
의 가속 적 발전은 미래충격의 가장 큰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교통수단의 발달
과 생산라인의 발달은 역사발전의 가속화를 촉진하였고 인간의 사고발전도 가속화하
였다. 신산업혁명인 조립라인은 컨 베이어 생산 시스템을 통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
지만 최근에는 컴팩(Compaq)회사에서 모듈라 셀 (Modular Cell) 방식을 통하여 획기
적인 가속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교통수단과 생산방식 뿐 만 아니라 대중문화
나 학문의 발달도 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중가요의 가사가 빨라지는 것 도 이
러한 미래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미래적 현상을 교통수단의 발달과 지식
의 발달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단 12:4).
(4) 기술산업의 혁명
종전의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과 천연자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래
의 신산 업은 이러한 종전의 원동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술혁신의 사이클이 빨
라질 미래사회는 기술 을 제3의 물결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역
사적 전개를 토대로 보면 미래산업 의 추세는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
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들이 발
달하게 되며 정보산업이 전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형태가 발 달하고 대기업과
소기업 사이의 네트워크 그리고 컴퓨터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하게 될 것이 다.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신산업을 주도할 중요한 두가지 요소는 컴퓨터와 로봇이라고
한다. 그래 서 미국과 일본이 당분간은 세계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고도 예측한다.
근래에 와서 신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컴퓨터를 통한 지식 정보의 체계와 로봇을 통
한 자동화 체계이다. 컴퓨터의 발달 은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사회의 변동을 가능하
게 했으며 고도화된 정보통신 체계를 만들어 주었 다. 가술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삶
에 또다른 역기능도 제공하는데 사이버 스페이스(cyper space)가 그 하나이고 노동
의 종말이 또다른 하나이다. 가상 현실(vertual reality)는 이제 더 이상 가상이 아
니라 현실이며 로봇은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내게 된다. 가상 현실의 세계는 새로
운 윤리적 과제를 낳게 할 것이며 교회의 목회 구조를 혼란하게 할 것이다.
(5) 정보사회
현대사회를 후기 산업사회 혹은 탈근대 사회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라
는 명 칭은 가장 현실적이며 타당한 현대사회의 표현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지식
사회(Machlup), 전자 기술사회(Brezezinski), 후기산업사회(Bell), 새로운 산업사회
(Galbraith), 초산업사회(Toffler), 혹은 고도기술사회(Naisbitt)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미래사회
는 세계화를 주도하는 3T 가운데 장거리 통신이 가장 발달할 것이다. 나이스비트는
장거리 통신을 글로벌 패러독스의 동인이라고 한다. 점차적으로 텔레비젼과 컴퓨터
와 전화는 개별적인 기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로 혼합되고 있으며 이러한
복합 시스템은 가속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지구상의 모든 개인에
게 시차없는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네트워크와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정보
초고속도로의 개발로 더욱 가속 적으로 발달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정보공급을 위하여 '국가정보인프라(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를 구축하였고 세계적 차원에서 '세계정보인프라(Global
Information Infrastructure)를 구상중에 있다. 나아가서 정보의 자본화를 위하여
정보라운드의 개념까지도 고 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보 초고속도로를 위하
여 이미 44조8천억을 투입하여 2015년 완공 을 목표로 공사중에 있다. 이동통신도
보편화되고 극도로 발달하게 될 미래형 산업이 될 것이 다.
(6) 새로운 우주관
미래사회는 전통적 가치관과 신념들이 붕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 현상들이 출현할 것이다. 우주관의 변화와 더불어 형성되는 가장 뚜렷한 미래
형 가치관은 임시성 과 일회성의 발달이다. 이러한 미래형 가치관은 소유의 개념보
다는 임대의 개념이 발달하게 되며 이러한 가치관은 새로운 생활관과 윤리관을 형성
하게 될 것이다. 임시성(disposability)의 발달은 일회성 문화(throw-away culture)
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가 일회용으로 전환되며 영속적인 정신에서
단기적인 사고로 전환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편의주의가 발달하여 교회도 편의점
식 교회를 선호하게 될 전망이다.
(7) 과학의 발달
미래사회는 지식이 팽배하는 지식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우리 곁
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미 미래적 현상 속에 살고 있다. 1994년 한해동안 국내에
서 발간된 단행본은 29564종으로 엄청난 수로 지식의 총화가 발달하고 있다. 현재는
지식의 총화가 매 5년마다 배가 가 되지만 2020년에는 73일마다 배가가 된다고 한
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각 종 기계들은 작아지고 기능화되었
다. 그래서 이미 분자 나노기술이 연구되고 있으며 나노기술 (Nanotechnology)은 실
용화되고 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더욱 개발해 주었고 인간의 과학의 과학의 무
한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나이스비트는 미래사회를 생물학의 시대라고 규정한
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불임해소와 식량문제를 해소하는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 역기능 또 한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미 인간복제가 가능하게 되었고,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개발하여
생물의 개화를 조절하며, DNA를 추출하여 수천만년전의 생물을 다 시 살게도 한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하겠지만 생명에 대한 신학적 과제를 제공
할 것이다.
1.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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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의 바로 그 시점(始點)에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수세기를 통하여 줄곧 "아버지"(창 32:9) 또는 "조상"(출 3:15)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온, 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게 이삭과 야곱의 혈통계보 상의 아버지만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드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야 했는가 하는 것을 모법넉으로 보여 준 대표적 "모델"이라는 의미의 아버지, 즉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아버지"그 자체였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대표적 모델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인식될 수 있었던 요소는 이런 것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⑴ 첫째로 그는 믿기 어려운 "시의 약속"을 그 희망없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믿고 기다렸던 <믿음의 아버지>였다 그는 땅도 없고 후손도 없는 유랑하는 "소수민"이요(신 26:5a) 아내의 묘지 하나도 장만치 못한 채로 이방 땅에 우거(寓居)하기만 하였던 "나그네"(창 23:4)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후손"은 비록 믿기 어려운 여건 속에 있다할지라도 그러나 반드시 받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감히 목숨과도 같았던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버리고 75세(창 12:4)의 나이로 감히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향(出鄕)하였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그 약속의 땅이 아브라함 자신을 위하여 주어진 땅이 아니라 장차 후손에게 주어질 땅이라는 것을 뒤는게나마 확인하고서도(창 12:7a) 그는 여전히 그렇게 억울하게 섭리하신 하나님(엘)을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집"인 "벧엘"제단을 쌓았던 사람이었다(창 12:7b). 이러한 신앙행위를 관철하신 하나님은 그의 이러한 신앙행위를 "의(義)"로 간주하였던 것이다(창 15:6).
⑵ 둘째로 그는 분명 "그에게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시는 신" 즉 "인격신(人格神)"이신 하나님 만을 예배하였던 <믿음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이 하나님을 결코 달리 부르지 않고 오직 조상이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불렀던 것이다. 학자들은 족장들의 이러한 하나님 신앙을 가리켜서 "암묵적 유일신 신앙(implicit monotheism)"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정착생활은 하지 못하고 단지 떠돌아 다니기만 하였던 유랑민이었다. 그러므로, 그 유랑 역사의 각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현현)하심을 체험하고 바로 그 임재 장소에서 그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만을 만났던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의 구원을 페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 제단을 쌓았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役思)하시는 하나님을 학술적으로는 "역사의 신" "사회적 신" 또는 "인격신"이라고 부른다. 즉 먼 후일 야곱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처럼(창 28:17). 바로 이 역사의 현장이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 "하늘의 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제도적 종교의 신(神)이 아닌, 즉 인생 나그네 길, 그형극의 요소 요소에서 친히 성육(成肉)하여 인간과 만나시고 인간과 동행하시며 그 인간역사의 희노애락에 응답하신 "역사(曆史)의 신"을 믿고 또 가르친 <믿음의 아버지>였다.
⑶ 셋째로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섬겼던 <믿음의 아버지>였다. 창세기 18장은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므라함이 "자신을 감추신 하나님"을 만나 그를 환대하였던 한 신비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세 사람들"(쉴로샤.아나쉼)중의 한 분이셨다. 물론, 창세기 18:1a의 신학화(神學化) 때문에, 성서 독자들은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야훼 하나님이 현현"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이 부분을 읽게 되지만, 그러나 주목할만한 점은 어디까지나 이 세 사람은 그늘과 쉴 곳을 찾는 피곤한 "나구네"(stangers=travellers)이고 그 가운데 한 분은 "스스로 자신을 인간 속에 감추시고 성육하신 (成肉:incarnated) 하나님(Deus absconditus)"자신 이시며(창 18:1a,10,13,14,17 etc) 나머지 두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창 19:1)였다. 문제는 놀라운 신앙(信仰)의 형안(炯眼)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통을한 자(창 18:16-33)는 아브라함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사실, 하나님 신앙의 가장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시 10:1, 13:1 etc). 이스라엘 최대의 신학자로 알려진 예언자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기를 끝내는 이스라엘 역사 아주 오랜 후대에 가서야 비로소, 그리고 70년 포로기라는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의 역사를 먹고 산 이후에야 비로소,"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이 실상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다"(사 45:15)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번영과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빛 보다는 어둠 속에서 그리고 평안 보다는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사 45:7)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한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위대한 신앙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도, 아주 휴일, 신학적으로 반성하여 말하기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하나님)을 대접한 이들[아브라함, 룻]이 있었느니라"(히 13:1-2)라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⑷ 끝으로, 그는 성서의 하나님(야훼)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모범적으로 밝히고 증언한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으로서 살았던 <믿음의 아버지>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다신론적 종교환경 속에서 참 하나님의 실재를 찾으려고 목숨을 건 신앙적 투쟁을 한 자였다. 이 투쟁은 모리아 산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해답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제지하시며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참 하나님은 아들을 제무로 바치기 요구하는 반윤리적인 모압의 <그모스>(Chemos> 신이나 암몬의 <밀곰>(Milcom) 신과는 다른 신(神)으로서 매우 윤리적인 신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참 하나님은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참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종교"라는 굴레 안에 감금되어 그 종교규범으로서 그 본질이 규정되는 그런 분은 결코 아니신 것이다. 그는 진리 그 자체이실 뿐이시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 진리를 터득한 <신앙의 아버지>였다. 지극히 높으신 신 (엘 엘룐)의 제사장인 이방인(異邦人) 사제(司祭: 가난안 사제)멜기세덱이 축복을 받아 들이고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세는 바로 이러한 문맥 안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