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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20


1.
미국은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입니다.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독교인의 수는 절대 다수이고 기독교 신앙의 영향은 강력합니다. 그래서 선출직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기독교가 대세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선교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이 위험하지도 않고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 보통, '전도'(evangelism)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리키고, '선교'(mission)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면 영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여러 가지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차별 당하고 박해 받는 소수자(minoirty)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 중 기독교인은 천주교와 개신교와 정교회 등 모든 종파를 합쳐서 2%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사는 아랍인들 즉 팔레스틴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은 한 때 20% 정도였는데, 박해와 테러의 위협 때문에 꾸준히 이주하여 이제는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절대 다수는 유대교인들이고, 아랍인들의 절대 다수는 무슬림입니다. 
유대교인들과 무슬림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바치는 헌신의 정도는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꼭 방문하는 곳이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입니다. 영어로 the Western Wall이라고도 부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서 있는 곳을 '성전산'(the Temple Mountain)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전체가 무슬림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은 성전을 두르고 있는 벽 중에 서쪽 벽뿐입니다.(지도 1)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그 벽을 만지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사진 1) 화강암을 깎아 쌓은 성벽 사이에는 기도문을 적은 쪽지가 수 없이 꽂혀 있습니다.(사진 2) 유대인 혹은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눈물 나는 일입니다. 

저와 일행도 통곡의 벽 앞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는 유대교인들의 기도와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효력을 다했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성전에 임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전산이 누구의 소유가 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전산을 둘러싼 그 오랜 갈등과 투쟁이 평화로이 풀리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저는 땡볕 아래서 통곡의 벽에 기대어 기도를 하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왼쪽에 보니 성벽에 연결된 건물 아래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고, 그곳에는 성벽을 따라 경전과 성물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에어콘 바람도 불었습니다. 그곳에 전통적인 복장을 입은 유대교인들이 늘어서서 소리내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사진 3) 아마도 하루 종일, 혹은 밤을 새워, 혹은 몇일 또는 몇 주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과연 하나님은 저렇게까지 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가 저의 믿음에 바치는 헌신과 열정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복음이 들어갈 바늘구멍만한 틈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특유의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종교만을 붙들고 살 것이 틀림 없어 보였습니다. 

무슬림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지를 다니며 시간을 맞추어 메카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무슬림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사진 5) 절을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등을 어떻게 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2.
이스라엘은 복음이 들어가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입니다. 참, 아이러니 중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를 이은 분인데,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철저한 외면을 받아 왔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랬고,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그래 왔습니다. 
아랍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랍권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여러 가지의 손해와 박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7세기부터 기독교와 이슬람은 피비릿내 나는 전쟁을 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적대감과 의심이 무슬림들에게 있습니다. 많은 아랍권 국가에서 개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이나 아랍권 국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사를 가르는 문제입니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당합니다. 끊임없는 압력과 박해에 노출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예수 믿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전도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씨도 안 먹힐 것 같아 보입니다. 유대교인들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바치는 헌신은 완고하다 싶을 정도이며, 거의 맹목적인 복종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다른 누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소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는 위험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전도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아랍권 국가에서는 전도하는 사람도, 전도를 받아 개종하는 사람도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요르단에는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는 관습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즉,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행하는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른 종교로 개종한 가족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요르단 여성이 영국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남자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삼촌이 비밀리에 영국에 들어가 조카를 살해하고 돌아와 당당히 자수했다고 합니다.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살해한 것이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이런 상황들 앞에 서면, 선교와 전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믿음들이 흔들립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이들에게도 선교와 전도를 해야 하는가?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가? 아무런 열매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해야 하는가? 차라리 저들을 저들의 신앙에 맡겨두고, 그들에게 쏟을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쏟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닌가?

저는 성지를 다니는 동안 이 질문들과 씨름을 했습니다. 돌아오고 나서도 여전히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대답하지 않고 얼버무리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답을 구했습니다. 그 사이에 정리된 생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질문들은 결국 한 가지의 큰 질문에 수렴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가? 

예수가 아니어도 된다면, 유대교인들에게 혹은 무슬림들에게 전도와 선교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가야 할 길과 살아야 할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인류에게 진정한 희망이 있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죽고 나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을 그들의 종교에 맡기고 손을 털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가 아니고는 안 된다면, 전혀 불가능해 보여도, 때로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일이라 해도 선교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전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3.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니까 예수를 믿게 되었지, 인도에 살았으면 힌두교를 믿었을 것입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나는 예수님만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을 여러 성인들 중 한 분으로 믿습니다. 그러니 굳이 예수가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마누라 무서워 나옵니다'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각자 자신이 본 대로, 느낀 대로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느냐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내가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인지는 한 번쯤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그분은 제자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는 곳 즉 가이사랴 지방의 빌립보로 갔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일종의 수양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3절)

그러자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세례 요한이 다시 나타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죽지 않고 들림받은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은 예레미야같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 각자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믿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한 참 듣고 있던 주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5절)

예수님이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아직 정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진리 앞에서는 자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내가 누구다"라고 선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의 부름에 따라 가르치고 행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즈음에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차렸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6절)

아마도, 이것은 베드로 혼자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자리에서 제자들이 수 없이 질문하고 답하여 얻은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보내기로 약속한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그 대답을 칭찬해 주십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들이 더 보아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터져 나오는 권위있는 말씀과 이적의 능력만을 보았습니다. 더 볼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까지 보아야만 예수님이 왜 구원자이신지, 예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다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히브리어 '메시야'와 헬라어 '그리스도'는 같은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실 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메시야로 믿으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믿은 대로 그리고 제자들이 믿은 대로 그분을 구원자로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새 사람으로 살아가며 이생과 내생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예수 아니면 안 됩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임하게 하려면, 예수 아니면 안 됩니다. 그것이 교회가 서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가 아니라 석가여도 괜찮고 모하메드여도 괜찮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메시야로 오셔서 메시야로 사시고 메시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구원자로 역사하시는 예수님께, "저는 당신을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나 자신에게는 그분의 구원이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저는 당신을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Community organizer로 존경할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아, 기독교의 '독선'(self-righteousness)과 '배타성'(exclusiveness)이 또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비판받는 점이 바로 독선과 배타성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기독교는 많은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특별히 다수가 되었을 때 그리고 부와 권력을 가졌을 때는 더욱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에 대한 반성이 '예수가 아니어도 좋다'는 쪽으로 기울면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행동한 데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진실하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복음을 전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해 자신이 없을 때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자세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해 진실하게 믿는다면 그런 태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하나님은 굳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어도 됩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예수님은 굳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됩니다. 계속하여 갈릴리에서 인기를 누리면 되었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그분은 십자가를 피하셔도 되었습니다. 굳이 그 잔을 마시지 않았어도 됩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베드로는 어부로 살면서 소소한 재미를 즐기며 살아도 되었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바울은 율법교사로서 그리고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권세와 부귀를 누리면 되었습니다. 동족의 박해를 피해가면서 이방 도시를 전전하며 고생을 자초하다가 마침내 참수되어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기독교는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5.
예수가 아니어도 되었다면, 27세의 아펜젤러와 26세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멀고 먼 길을 건너 낯선 땅을 찾았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 상황은 지금의 이스라엘 혹은 아랍 국가의 상황보다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언더우드의 마음을 작가 정연희씨는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싶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예수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믿었다면, 조선인들에게는 이미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무당 종교도 있으니 그들의 종교에 맡기자고 생각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도 인간이었던지라, 눈에 보이는 절망감과 좌절감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기도문 마지막에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실에서 엄습해 오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던 그들의 선교가 마침내 수 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믿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얼마나 귀한지요! 물론, 선교사라고 다 같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타락한 선교사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귀한 헌신을 하는 선교사들이 더 많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처럼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생을 통해 단 한 영혼을 건지더라도 좋다는 결의로 겸손하고 신실하게 현지인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우직한 헌신 앞에 우리는 다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질문해 보십시다. 나에게도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가? 과연 우리에게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는지 따져 보십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풀어 쓰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저를 구원하실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믿음은 우리에게도 생사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믿음은 교양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취미의 하나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면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면, 아랍권에 사는 기독교인들처럼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는다 해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나에게 있습니까?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매일 그 복음을 실천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생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면, 그 생명의 물이 나에게서 고이게 만들면 안 됩니다. 복음을 통해 내가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을 나만 알고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을 만나서 "나는 이렇게 살테니, 당신은 그렇게 살다 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도 예수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복음을 나눕니다. 만일 우리가 전도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예수가 아니어도 된다고 믿고 있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자신의 생애를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물질로 헌신해야 합니다. 한국의 온누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가라, 아니면 보내라"는 말입니다. 선교사로 나서거나 선교사를 도우라는 말입니다. "나 혼자만 잘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얼른 들으면 매우 성숙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이기적이고 악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잘 믿는' 사람이라면 전도와 선교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감사하십시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행 4:12)

이 믿음을 지키십시다. 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십시다. 예수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간증할 수 있도록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십시다. 그리고 이 믿음을 전하십시다. 온 세상 만민이 주님의 이름 앞에 돌아올 때까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고 또한 헌신하십시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은 주님께 영혼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구원이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고, 또한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해 영혼 구원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 아니고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붙듭니다.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하소서.
주님 아니고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합니다.
저희를 붙드시어
주님 뜻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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