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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에베소서 2:16-22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떤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가면서 이 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관심을 보이느라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무언가 벽돌을 쌓고 있는 아이를 향해서 "너 뭘 하고 있는 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어린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쉿! 아빠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것의 손을 잡고 교회에 늘 다니긴 했지만은 교회에 갈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 그러고 늘 말썽이었는데 이 만큼의 믿음이 생긴 것 같이 생각이 되어서 대견하게 여기고 한 마디 더 물었습니다. "애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아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빠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깨잖아요." 이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때마다 잤거든요. 졸은 게 아니라 잤어요. 애가 이걸 보고 있다가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야 되니까 떠들지 말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랍니다.
이 기막힌 얘기가 아닙니까?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관 그것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생활 중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입니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세 가지 고백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믿고 있느냐?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옛날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심판하시는 분이요 죄인을 가차없이 벌하시는 분이요 아주 무서운 폭군과 같은 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그대로 즉시 즉시 벌이 내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미 법을 어겼기 때문에 나는 구제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주 하나님의 백성 됨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아예 포기하고 버려진 자로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차피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니까 율법이고 뭐고 축복이고 저주고 생각할 것 없이 되는대로 살아버리고 말자 하는 그렇게 버려진 존재의식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관, 즉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렇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그래 우리가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에 하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요, 사랑스러운 아버지, 설사 진노가 있어도 그 진노 속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노적 사랑, 그런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아버지 얼마나 좋은 아버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 못된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에 유산을 나누어주는 아버지,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또 돌아왔다고 해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돼서 왔지만 살아 왔다고 고마워서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바로 그 아버지, 이 좋은 아버지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 상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이렇게 믿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오늘도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관이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교회관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긴 설명을 드리진 못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친교기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악수하고 뭐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봉사기관이 아닙니다. 봉사 하지만은 봉사가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학문을 가르치고 지혜를 가르치고 생활철학을 가르치는 그러한 학원이 아닙니다. 이런 지적인 기관이 아닙니다. 인스티튜트(Institute)가 아니요, 또 하나는 여흥기관이 아닙니다. 요새는 이상한 모습으로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를 하나의 감정순화의 기관으로 생각해요. 소리 지르고 손뼉 치고 요란하게 이렇게 해서 오락기관으로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이런 여흥기관으로 흘러가는 것을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 아버지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계신 곳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열두살 때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나이까?" 너무나 좋은 말씀이요. 열두살 된 어린이 예수님도 성전을 생각할 때 내 아버지의 집, 거기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데 있어요. 내 아들로 여기에 있다, 이런 마음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그리고 전통적 상징표현에 의하면 교회를 어머니로, 신령한 어머니로 생각하는 그러한 고백 속에 나의 나 됨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다 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관에 문제 있습니다. 교회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 하므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마다 여기에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스운 얘깁니다 만은 제가 교회가 이렇게 수가 적을 때는 교인의 이름도 외우기도 하고 부지런히 교인들과 개인적 관계를 많이 맺으면서 목회해 왔습니다 만은 이렇게 교회가 수만명 되고 그러니깐 이제는 제 기억력으론 도저히 불가능해서 아예 포기했습니다. 뭐 외우려고 하지도 않고 꼭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데 간혹 우리 권사님들 가운데 보면, 권사님이 한 오백여명 되는데 제가 권사님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는 길에서 딱 만나면은 좀 나를 괴롭히는 권사님이 계세요. 딱 만나서는 "목사님 저 아십니까? 저 소망교회 교인인 것을 압니까?"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하는 말이 "저 소망교회 권사입니다." 이런 얘기 할 때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자고로 나는 여자 얼굴을 똑똑히 안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곽목사가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알아야지요. 예수님이 알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깐 "그야 그렇지요" 합디다 만은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그 누가 알고 모르고 알아주고 몰라주고 그 무슨 대수로운 얘기입니까? 잊어버리세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야 되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되고 생명력을 체험해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개별적으로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새롭게 확인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의 영광 예수의 말씀이 있어서 교회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모여서 친교하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떠나서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 비록 교회에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아주 못박아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의 궁극적 관심은 예배다.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있는데 그 예배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을 듣고, 이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깐 교회가 필요하다. 또한, 넷째는 '성경을 바로 해석해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에 서도록 지도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릴 때마다 생각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73년에 제 개인으로서는 자가용 자동차를 처음 가져보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절 아는 교인들이 "목사님, 이거 왕래하는 데 여기서 차 없이 힘듭니다." 그래서 돈을 개별적으로 모아서 아주 좋은 차를 사 주셨어요. 좌우간 제가 다니는 학교에 총장서부터 교수, 학생의 모두 중에서 내 차가 제일 좋았어요. 그런 차를 아주 브랜드-뉴(Brand-new)로 사주는 데, 사주고 나서 딱, 그 집사님 짓궂은 분이에요. 주의를 줘요. "두 가지 조심하십시오. 목사님 맘대로 운전하시되 딱 두 가지 조심하는데 첫째,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지 마세요." 여자 모는 차 따라가다가는 안 된다. 비껴가야 됩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은 위험한 일을 당하면은 눈 딱 감고 맙니다. 그러면은 이름도 모르고 동사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여자 운전하는 거 불안하니까 고 뒤따라가지 마세요. 첫째요. 두 번째는 기름 넣는 거 조심하세요. 미국에 많은 주유소가 있는데 이 주유소 중에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주유소도 있어요. 이 가솔린이라고 하는 것은 땅 속에다 넣어 놨는데 이거 잘못 관리하면 기름 속에 물이 들어가서 섞여 가지고 있는데 막 그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날이면은 낭패입니다. 그런고로 반드시 주유소에 기름을 넣되 넣으면서도 고급, 잘생긴 주유소에 가서 넣을 것이고 그걸 조심하라고.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내가 한번 진짜로 경험했어요. 멀리 여행을 하다가 산으로 올라갔는데 여기서 기름이 떨어졌어요. 거기 보니까 정말 아주 열악한 주유소에 기름 펌프가 둘밖에 없는데 노인이 앉아서 졸고 있더라구요. 이 기름이 이거 시원치 않은데 하면서도 뭐 어찌할 수가 없어서 넣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가다가 딱 막히질 안습니까. 몇 번 수리해도 안 되요. 마지막에는 기름 탱크를 이 휘발유 탱크를 뜯어 가지고 이걸 청소해 내는데요 아 이거 참 큰 일이더라구요.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교회는 주유소와 같아요. 아무리 좋은 차라도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어야 되요. 그런가 하면 그 주유소에서 주는 공급하는 기름이 깨끗해야 되요. 티가 없어야 되요. 여기가 오염되고 이게 시원치 않으면은 여러분의 인격은 곤두박질해요. 운명도 엉망이 되고 말아요. 그런고로 여러분 교회 잘 선택하는 것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큰 축복임을 알아야 되요. 좋은 주유소에서 깨끗한 휘발유를 넣고 달려야 이 차가 제 구실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와 같이 우리는 교회에서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을 계속 공급받아야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업 우리의 인격 우리의 운명이 바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교회를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설명해 나갑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은 예수는 화평이다. 화평이시라고 결정적으로 말하고 15절에는 예수께서 화평을 이루신다고 말하고 17절에 가서는 화평을 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전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존재하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고 전도자를 고용하고 성령의 역사와 함께 주님 친히 화평을 이루시고 화평을 전하시는 것이올시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교인은 누구냐 이거예요. 우리 교인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 권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이케이오이'라고 하는 말은 '오이코스'라는 말은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 집에 한 식구가 된다는 겁니다. 이 집은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가정을 말합니다. 가문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가정에 이 하나님의 가정에 한 권속 한 식구가 된다 멤버쉽이 된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이 가정이라고 하는 건 흔히 말하기를 뭐 끈끈한 정이라고 합니다만은 이건 얘기가 다릅니다. 끈끈한 게 아니라 영영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피로 맺은 것이니까요. 내 자식이요 내 부모입니다. 이 관계는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그 주는 성현이 아닙니다. 선생이 아니요 능력 있는 자가 아닙니다. 과거의 예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앞으로 재림하실 분입니다. 리빙 크라이스트(Living Christ), 과거의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현재 살아 계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 세력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권속, 하나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이건 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우리 성도들 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건 윤리 이전에 있는 큰사랑이요 확실한 사랑의 실체입니다. 나아가서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전인적 관계요 공동 운명에 속한 관계요 그리고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흔히 이름지어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어떻게 살던지 가정이야 어떤지 상관없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한 식구가 되고 서로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살다가 이대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갑니다. 영원한 종말론적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이라고 그런고로 우리가 왕 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고 그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겁니다 또 나아가서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거룩히 구별된 무리입니다. '하게우스'라는 말은 구별됐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구별되었습니다. 비록 속된 세상에 살지만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한 약속을 보장받고 오늘은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올시다.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924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있을 때 파리에서 열렸는데 이 올림픽 경기에 에릭 리들이라고 하는 영국청년이 100m경주의 선수로 나가게 됩니다. 그는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게 금메달 유망주로 다같이 인정을 했는데 경기 일정이 주일날로 잡혔습니다. 그럴 때 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올림픽 경기를 포기하겠다고 그랬어요. 절대 안 나가겠다고, 뛰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게 될 때 영국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조국을 배반한 자요, 위선자요, 옹졸한 신앙인이요, 비겁한 자요. 뭐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이 청년은 "아니요.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금메달을 향해서 뛸 마음은 없어요." 거절해버렸어요. 그리고 주일날 교회 나가서 종일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했답니다. 그 다음에 다른 분들이 좀 설득을 해서 이제 주일을 지키고 난 뒤에 400m경기가 있는데 400m경기에 좀 나가줄 수 없겠느냐고 그래요. 주일날이 아니면 나가보겠다고. 100m 경주자가 400m경주에 나가서 뜁니다. 이건 사실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경기는 이러했답니다. 처음부터 100m경주하는 사람의 솜씨로 총알같이 뛰었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생각하기를 '저 사람 200m 뛰고 나서 아마 고꾸라질 모양인가 보다' 했는데 그대로 줄기차게 뛰어서 그는 세계 기록을 내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목에 걸었을 때 기자가 물어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 "200m는 내 힘으로 뛰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내가 100m 경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나머지 길은 주여 인도하소서 하고 뛰었는데 내가 금메달을 땄다"고.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묻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의 경건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교회요, 내가 마지막 의지할 것이 교회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압구정동 이 주변이 벌써 오래 전에 지은 아파트인데 아직도 집 값이 내려가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복덕방 주인이 말합니다. 복덕방에 와서 "내 이 교회 주변에서 교회와 함께 살다가 마지막 죽을 랍니다. 집 값은 얼마라도 좋으니 소개하시오." 이런 사람 일년에 몇 사람만 있어도 집 값은 안 내려가는 거예요. 나는 이것을 자랑삼습니다. 이 교회와 함께 마지막 생을 산다. 아니 그렇습니까. 무슨 경치 좋은 데가 중요합니까. 뭐 공기 맑은 데. 몇 일이나 더 살겠다고. 중요한 건 교회예요. 마지막 의지할 곳은 교회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큰 계약을 하다가 주일날 꼭 해야한다면 안 해요. 포기하는 분도 있어요. 멀리멀리 여행하다가도 주일 하루 지키기 위해서 달려오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가 다 그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마는 그의 신앙은 특별합니다. 거룩함,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거룩히 지키면서 나 자신이 거룩하고, 내 생활이 거룩하고, 내 입지가 거룩하고, 내 운명이 거룩해지는 것이 성도올시다.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와 사귀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회의 권속으로서의 행복을 즐깁니다. 여기에 승리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