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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으로(7) - 복음을 살다(Live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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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으로(7) - 복음을 살다(Live the Gospel)
고린도전서 15:12-19
1.
Happy Easter!
지난 수요일 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이렇게 인사하는 것조차 미안하고 주저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소식에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세계 10 대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다니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였기에 더욱 안타깝고,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이 청소년들이어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생사를 알 수 없어서 애타게 부르짖는 부모들의 모습은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을 캐고 들어가면 결국 탐욕에 뿌리가 있기에 더욱 참담합니다.
사람들의 크고 작은 탐욕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이렇게 엄청난 비극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
한 순간에 꺾여 버린 수 많은 꽃송이들로 인해 그리고 그로 인해 무너진 가슴들을 생각하며 함께 아파합니다.
이러한 초대형 비극의 충격 속에서 설교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주일입니다.
축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날입니다.
절기에 맞게 부활의 기쁨을 설교해야 하는데, 비명에 간 희생자들과 그들로 인해 아파할 가족들을 생각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설교를 위해 할애된 시간 동안 기도만 하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 준비는 특별히 힘겨웠습니다.
설교의 첫 머리를 여러 번 썼다 지웠다 하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데,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부활의 복음이 들려져야 할 때라는, 지금과 같이 슬픔과 절망과 고통이 깊을수록 부활의 복음이 더 필요하다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마음을 수습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2.
저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복음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순서인데요,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복음은 애당초 '부활의 복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까지 갔었고, 요한은 골고다까지 갔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들키지 않고 갈릴리로 돌아가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어 지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요한이 적어 놓은 한 문장은 당시 제자들의 심정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20:19)
그런데 얼마 지난 후부터 잠적했던 제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시작했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Jesus has risen from the dead.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God raised Jesus from the dead.
사실, 잠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 믿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그렇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여러 번 예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은 알아들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말 뜻은 알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나옵니다.
의학적으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다가 돌아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대개 그 상태에서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생의 궤도가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그것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한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죽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소생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 몸과 전혀 다른 몸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봉착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일상적인 사건을 묘사할 때에만 제 역할을 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사건 앞에서 언어는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는 것이고 또한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초대형 비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습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 앞에서 아무리 말을 찾아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옛날 몸으로 소생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설명 가능합니다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과는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일차원 시간을 넘어 활동하십니다.
우리 몸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일직선으로 진행합니다.
돌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늙어가는 흐름을 거슬러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몸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 일하십니다.
또한 삼차원 공간을 넘어 활동하십니다.
제자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숨어 있을 때 불현듯 나타나셨다가 꿈인듯 사라지십니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고, 그 모습은 생전에 보던 그분의 모습인데, 그 몸은 알 수 없는 신비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신령한 몸'(고전 15:44)이라고 부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도난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상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던 일이지만, 죽어서 매장된 예수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을 소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물론, 부활이 어떤 것인지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아가 모태 바깥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3.
부활의 사실을 믿고 이해하자, 예수님이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으며, 인류 역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예수님께 대해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실타래 풀어지듯 풀려 나갔습니다.
그 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때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 올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두 제자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마 17:9)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주일이면 제 아내가 예배당 입구와 복도에서 부지런히 오가며 교우들을 맞이합니다.
교인으로 등록된 분들은 그 사람이 제 아내인 것을 알기 때문에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압니다.
반면, 처음 왔거나 혹은 예배에만 나오는 분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 저 여자가 왜 저렇게 아무나 보고 이유 없이 웃는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저희 집에서 새교우 환영 만찬을 하는데, 그 자리에 와서야 그 사람이 제 아내임을 압니다.
그 때 놀라는 분도 계시고, 미안해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제야 이해합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했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것이 다른 율법학자들과 달랐고 전에 볼 수 없던 이적을 행하셨기에 특별한 분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런 뜻인 줄 몰랐고, 그런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믿어지지 않던 그분의 말씀들이 하나씩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 과연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목숨보다 큰 생명이 있다는 것, 그러기에 먹고 마실 것을 위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다 믿어졌고 또한 그렇게 살고 싶은 열정이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잠적해 있던 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믿지 못했던 부활이었기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부활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죽음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전에는 사람들로부터 무시 당하는 것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 놀라운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13-14 절)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6-17 절)
오늘날에도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듯, 고린도 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생각하며,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9 절)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영생을 믿었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빌 3:8-9)
그러니 만일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헛된 것에 전 생애를 바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삶이 뒤집어진 사람입니다.
그랬기에 부활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자 그의 세계관이 바뀌었고, 세계관이 바뀌자 그의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4.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활동하고 계시다는 믿음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믿음
◎ 놀랍고 신비롭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믿음
◎ 이 땅에서의 삶은 우리가 누릴 생명의 일부라는 믿음
◎ 죽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믿음
◎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는 믿음
없었습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면 버려야 할 믿음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고집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세계관을 고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Copernican Revolution)보다 더 중대하고 심각한 변화를 요청한다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다음과 같은 옛 믿음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라는 믿음
◎ 예수님은 훌륭한 도덕 교사라는 믿음
◎ 십자가는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믿음
◎ 이 세상이 전부라는 믿음
◎ 이 땅에서의 삶의 전부라는 믿음
◎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믿음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 나는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는 믿음
이렇게, 세상과 인생에 대한 관(觀, perspective)이 바뀌면 살아가는 방법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에 만족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바칩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줄 알기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씁니다.
5.
부활을 믿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보고 그 세상에 맞추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울고 웃고, 함께 일하고 쉬고,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고, 빈무덤에서 천사를 만납니다.
그 천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마 28:7)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들을 정리한 것 뿐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면 세계관이 뒤집히고, 세계관이 뒤집히면 인생관이 변합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온 사람들이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듯, 부활을 믿고 그로 인해 새로운 믿음이 생기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인생이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6-17)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잣대'로 안다는 말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한 유대 청년' 혹은 '위대한 도덕 교사'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아직도 옛날 세계관 즉 유물론적인 세계관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육신의 잣대'를 버리게 됩니다.
육신과 물질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인생이 달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달라집니다.
16 세기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그 이전까지 정설로 되어 있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뒤집어 엎었습니다.
여러 가지 증거들을 기초로 하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처음에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한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경배 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갈릴리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갈릴리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혹은 우리의 갈릴리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기 전까지는 부활을 제대로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는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 같은 성령님을 믿지만, 교리와 실행에 있어서 다른 점이 많습니다.
두 교파 사이에 두드러지게 다른 점 중 하나가 십자가입니다.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십자가는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의 몸이 달려 있는 십자가 형태를 사용합니다.
반면, 개신교회는 빈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이 차이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십자가가 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십자가의 예수님 상을 우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장 깔뱅(John Calvin)같은 사람은 빈십자가조차도 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장로교회 중에는 강단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교회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개신교회는 빈십자가를 거룩한 상징물로 여깁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강조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고난을 더 강조하고, 개신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더 강조합니다.
그로 인해 천주교회는 진지하지만 무거운 경향이 있고, 개신교회는 밝고 긍정적이지만 가벼운 경향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배우고 보완해야 할 점입니다.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강단에 걸려 있는 저 빈십자가를 볼 때마다 물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셨지!"
이것도 좋은 대답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셨다"는 고백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셨던 주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에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나의 갈릴리에 계십니다.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살고 죽기 위해 나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 떠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성에 눈 뜨는 것, 그 죄의 심각성과 죄로 인한 진노로 인해 무너져 우는 것,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고 돌아가셨음을 믿고 감사함으로 기뻐하는 것, 십자가의 보혈로써 죄 씻음 받고 새 사람으로 지어지는 것,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믿고 새로운 세상에 눈 뜨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남겨진 인생의 나날들을 어찌 살려 하십니까?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고 그리고 사고 후에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분노를 참을 길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자본주의(capitalism)와 성공주의(blind pursuit for success)그리고 보신주의(self-protectionism)에 물든 인간 군상들 속에서 어찌 살려 하십니까?
이것을 먼 나라의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어이없는 총격 사건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는 전쟁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목숨 내놓고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일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 받는 습관을 익혀야 하겠습니다.
이번 사고의 와중에 희생자와 부모들 사이에 오간 문자 메시지 중 가장 찡하게 마음에 와 땋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엄마한테,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여학생은 구조 되었다고 합니다.
그 문자 메시지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사랑은 위대하구나. 사랑밖에 없구나.'
매일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하기에 아직 함께 있을 때 더 진실하게, 더 애틋하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부활의 복음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이 초대형 사고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우리 모두에게 꼭 들려져야 할 복음입니다.
희생 당한 사람들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지금 이 복음을 전해 주면 뺨을 맞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 부활의 복음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슬픔과 어둠 속에서 함께 우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낼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품을 발견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시간 있을 때, 아직 안전하다 할 때, 복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 깊이 새겨지도록 매일 주님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의 가장 깊은 계곡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와 같은 비극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은 복음이 아니고는 치유될 수 없는 타락한 영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복음의 사람, 진정한 부활의 신앙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희망은 복음밖에 없음을 진실로 믿고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게 하도록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
저희로
부활을 믿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