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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lan Chapel - 진솔한 자기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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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자기고백


요 11:25-26, 43-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십리 길입니다. 거기에 나사로가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 그곳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오셔서 무덤으로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기 2주전에 일어난 일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시점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셨을까요? 그리고 이 사건으로 주시려고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점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베다니의 삼남매

베다니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뒤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께 붓기도 했습니다. 나사로는 언제나 예수님과 대화의 상대자였습니다. 이 3남매가 항상 의좋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좋은 가정에 뜻밖의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남동생 나사로가 병들었다가 얼마 후에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허망한 죽음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잊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나면 이해가 갑니다. 어떤 죽음은 호상(好喪)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고 연세가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나면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하고 찬송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더구나 믿음 좋은 젊은 분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면 더욱 할 말이 없어집니다. 목회자로서 장례식에 참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참 곤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의 가정을 보십시오. 이 가정은 믿음이 좋았던 가정이었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삼남매를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예수님이 친구라고 부르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그 당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도, 믿음이 아주 좋은 신앙인에게도 이런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매일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형통하고 매사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렇게 선한 사람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험과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무고한 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에게도 극단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믿음 좋고 젊었던 나사로 집에도 이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사람을 예수께 보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가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아주 급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때 누군가 급히 협조를 요청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가정에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상을 많이 쫓아 다녔어도 그 순간 가족들은 허둥거리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 일을 부탁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것은 큰 축복입니다. 또한 집에 갑자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에게 급하게 중보기도를 요청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이웃이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 마르다를 보십시오. 자기 동생이 금방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을 보내 예수님에게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과 친하고 가까웠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과 가까이 교제를 했고 평소에 주님을 잘 섬겼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마음 놓고 주님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자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예수님께 빨리 오시라고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역하시던 중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사람을 보내놓고 오시기만을 학수고대를 했을 것입니다. 주님만 오시면 내 동생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 믿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습니다. 6절을 보면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거리가 멀어서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시며 할 일을 더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들이 알 것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나는 급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사람을 보내 주님을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했는데 주님은 이틀이 지났는데도 오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급한 일이 발생해서 다급하게 기도를 했는데 이틀이 지나고 3일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때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그때 주님이 급히 달려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를 살리셔야 합니다. 급히 응답이 주어져야 하는데 아무 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때 당사자들은 입이 바짝 바짝 마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여러분, 응답이 신속하게 주어지는 것은 다 좋은 것입니까? 기도하는대로 바로 열매가 생기면 다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매정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응답이 늦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가던 그 시간에 즉시 일어나 가지 않고 이틀이나 더 머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은 그 가족들에게는 잔인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병에서 나음을 받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죽음에서 살아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더 큰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그 사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나사로를 고치셨다면 그 사건은 가정사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할 때 응답이 늦어진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해서 늦추시는 것입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드디어 예수님이 나사로 집으로 가셨습니다. 가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예수님은 여기서 죽음을 잠으로 설명(마 27:52, 행 7:60, 살전 4:1)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잠이 무엇입니까? 잠은 내일 아침이면 깨어남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작별인사 하거나 유언하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잠은 참 좋은 시간입니다. 잠은 평안을 주고 쉼을 주고 안식을 줍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잠은 죽는 연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누웠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면 잠이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 있으면 죽음입니다. 잠은 매일 저녁 침대에 누워서 잡니다. 죽음도 땅 바닥에 누워서 오래 잡니다. 짧은 것은 잠이고 긴 시간 자는 것이 죽음입니다. 잠도 죽음도 똑같이 평안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을 오래 자고도 더 자려고 합니다. 또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10명중 8명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고 합니다. 살아가기가 힘들어서 그럴 것입니다. 잠도 죽음도 때로 평안을 줍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니까 마중을 나가서 예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그 말은 왜 빨리 오시지 않고 꾸물댔느냐는 불평입니다. 동생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원망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까닭 없이 우리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십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 보면 원망의 내용이 많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왜 응답이 없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에게 원망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원망해도 서운해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정체성 공개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공개하셨습니다. 2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송두리째 공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는 세마포로 동인채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순간 그곳에 감동도 있었고 소름도 끼쳤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대해서 순간 '저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나사로 사건의 중심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를 살려냄으로서 예수님은 "나는 메시야다.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점을 공개하신 것입니다. 즉 "나는 생명의 주인이다. 나는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을 소극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비유로만 얘기하셨고 빙빙 돌려서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려면 2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직접 공개하셨습니다. 자세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요한복음의 중심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로 모든 대화와 주제를 고난과 죽음과 부활 이야기로 전환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부터 바리새인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에서 20km 떨어진 에브라임으로 피신하여 전열을 정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일주일 전에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부활의 설명

또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세상에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부활은 믿기 어려운 신학이고 교리이고 신앙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글쎄요" 하고 믿지 못하는 분야입니다. 부활은 아주 믿기 어렵고 불확실한 신학입니다. 남산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날 설교하던 목사님은 어느 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은 평소 부활신앙이 없다고 평가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설교 때 열심히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그분에게 기자가 "이제는 부활을 믿습니까?" 하고 질문하자 "글쎄요" 하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믿기가 어려운 신앙이고 신학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활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신학이고 신앙이고 근간이고 뿌리입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요란하게 보내면서 부활절은 간단하게 행사로 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성탄절이 중심인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부활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탄과 비교가 되지 않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모두 28장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28%인 10장을 할애해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집중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인데 34%인 6장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24장 중 25%인 6장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21장 중 49%인 10장을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2장씩만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핵심은 고난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장차 있을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이 얼마 있으면 고난받고 죽어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심지어 도마는 내가 직접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 전에 나사로 사건을 직접 보고서도 그런 것입니다. 이 도마 사건은 우리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믿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부활을 상징할 만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봄에는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 새싹들은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 속에서 죽은 듯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니까 얼었던 땅을 비집고 돋아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봄에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또 나비와 잠자리들과 매미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은 한결 같이 애벌레 때 유충으로 먼지 속에서 거름더미 속에서 지냈고 시궁창에서 뒹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곤충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것들이 그 환경을 벗어버리고 신선한 이슬을 머금고 하늘을 날아다니게 됩니다. 애벌레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되고 잠자리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변화입니까? 부활은 변화입니다. 아주 신비한 변화입니다. 육신의 변화이고 신분의 변화이고 한계의 변화입니다. 곤충도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고작 죽음으로 끝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활은 신비한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사로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장례식에 가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이 길을 가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이 자리에 위치해 있게 될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변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가 임하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새생명이 돋아나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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