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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의 음모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재판한 기사를 더듬어 가고자 한다. 기사는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잡아왔다. 그리고 한밤중에 없는 죄를 있는 것같이 꾸며서 재판을 했다. 증인이 몇 사람이나 세워졌으나 어느 증인의 증언도 일치하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심문했고, 예수는 "당신이 말한 대로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대답을 듣고 자신들의 옷을 찢고(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때 행하는 유대인의 풍습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했다. 죽음에 해당한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피점령국인 유대인들이 종교상의 율법에 따라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상의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과 학자들은 예수를 직접 처벌하지 않고 총독 빌라도의 손에 넘겼다. 왜 예수를 돌로 쳐죽이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는 군중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군중이 떠들고 일어나면 자기들도 소란 죄에 휘말려 들어갈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 27:1~2)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들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는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는 것이었다. 종교상의 문제만으로는 로마 제국이 간섭을 안 한다는 것을 감안해서 한 고소인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는 가운데 그가 세상적인 반역을 계획한 것도, 왕이 되려고 한 것도 아닌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7장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쓰여 있는 대로,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더욱 야단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갈릴리는 선동자의 발상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같릴리 지방 출신이라는 것을 듣고 빌라도는 그때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는 갈릴리의 영주 혜롯에게 예수를 보낸다. 혜롯에게 동포의 심판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롯 역시 예수의 죄를 발견하지 못해 도로 돌려보내자 빌라도는 제사장과 관원들에게 그를 놓아주겠다 하지만 무리는 일제히 소요를 일으킨다.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눅 23:16~25)
결국 빌라도는 군중에게 만족을 주려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총독을 로마 정부에 고소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빌라도로서는 '이 무리들이 자기를 어떻게 본국 정부에 고소할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사실 과거에도 빌라도는 로마 정부의 귀에 들어가면 파면당할 뻔한 과오를 두 번이나 범했다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목숨보다도 자기 자신의 지위가 아까웠던 것이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죽음
이리하여 사형이란 판결을 받은 예수님은 즉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은 빌라도의 관저에서 400미터가 되는 지점에 있으며, 길이 꾸불꾸불하기 때문에 800미터는 걸었을 것이라고 한다.
처형의 날, 예수님은 무거운 횡목을 지시고 빌라도의 관저에서 나와 걸어가셨다. (십자가의 종목은 먼저 골고다 언덕 형장에 세워져 있었고 횡목은 죄인 또는 일꾼이 운반해 갔다.) 예수님이 힘이 들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예수님에게 마음을 기울였던 일꾼이 무거워서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마침 지나가던 사람에게 그것을 지게 했다.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형 집행 시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몰약 은 일종의 마약으로 못을 맞은 고통을 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그것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 받는 고통을 덜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인류가 받아야만 될 형벌을 조금의 할인도 없이 충분히 받는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이 최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도저히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망을 느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이란 말인가? 막다른 지경에서 어쩌면 그렇게 약한 말을 토했을까?
그러나 그때 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개인에게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달려야 될 사람은 죄 많은 인간이었으며, 그런 우리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인류가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인 것이다. 그 참기 어려운 단절을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해서 맛보셨던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 받아야될 벌을 피 한 방울 남기시지 않고 충분히 받으신 것을 이 말은 의미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모두 일곱 말씀을 하셨다. 그 중 또 하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들 앞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한 놀라운 말씀이다 조롱하며 비웃는 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기도를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인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기도야말로 나를 세례받도록 이끌어 준 말씀이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예수님은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로마군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감탄할 정도의 위대한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굉장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인류의 죄를 대혹해 주시지 않았다면 세계의 역사를 변경할 만한 존재는 못 되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인간의 죽음이고,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면 지금까지의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이 십자가에서 죽음과 그의 생전에 예수님 자신이 예언하고 계셨던 것처림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것과 부활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야말로 믿기 어려운 사건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몇 해를 지냈다. 성서를 읽어 보면 사도들까지도 그렇게 간단하게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올라 천사로부터 듣게 된 예수님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전했을 때,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않았으며,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 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과연 도마만이 의심많은 사람이었을까? 여자들의 말을 허탄하게 여겼던 베드로나 마태도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면 도마와 같은 생각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제자들을 변화시킨 예수님의 부활
도마는 그 후에 인도에서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도마의 이후의 신앙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마가도 벌거벗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는 유대인을 무서워하며 자기들이 거처하고 있는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도 모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도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연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직계 제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을 빼놓고는 열 사람이 후에 순교의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부신 활동은 사도행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내가 세례를 받게 되는 그해 정월에 나는 아사히카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목사님을 병원에 초정해서 환자들을 위해 집회를 갖도록 했는데, 같은 병동에 있는 남녀가 거의 모두 성서를 샀다. 그 중에는 위암으로 위를 자른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일 열심히 성서를 읽었다. 그 사람은 두 달이 못 되어 신약성서를 두 번이나 읽고 사도들의 이름까지 외웠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보잘것없었는데,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마치 딴 사람처럼 강해졌다.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했을까? 그것은 "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난 그 후에 제자들의 활동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다."고 말했다.
내가 지금 부활을 믿는 것도 이 사람이 말한 것같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눈부신 활동이 마치 딴 사람들이 아닌가 할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도 하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왜 그처럼 강해졌단 말인가? 예수님의 사후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물론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현상이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한 사람 또는 몇 사람, 그리고 수백 명 앞에도 부활의 모습을 나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었던 구세주가 확실히 예수님 이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구세주가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며, 어떻게 최후를 마치며, 어떻게 부활하는지를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언과 같이 오셨고, 가셨으며, 부활하셨다. 결국 예언대로 하나하나 성취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틀림없는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되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