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 왜 회개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목회상담
흔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다'. 분명 우리의 대부분은 사람을 죽였다든가, 물건을 훔친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들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비유 중 달란트 이야기가 있다. 어느 때 한 주인이 여행을 떠나게 되어 종들에게 각각의 능력에 따라 어떤 자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자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자는 또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맡았던 자도 또 두 달란트를 더 남겨 놓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았던 자는 그것을 땅에 묻어 놓았다. 돌아온 주인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종은 칭찬하였으나 한 달란트의 종에게는 엄하게 책망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 한 달란트의 종은 그것을 써버린 것이 아니고 맡겨진 것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책망받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아심도 품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 종은 한 달란트를 그에게 맡겨 준 주인의 신임에 대해 보답하지 않았다는 점에 책망을 받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죄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죄는 더 이상 윤리의 문제가 아닌 종교의 문제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죄를 윤리의 세계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종교의 세계, 하나님 은혜에 비추어 볼 때 어느 누구도 '죄없음'을 내세울 자는 없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감찰하시는 주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 7:21>)하며 탄식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자신이 도대체 어떠한 죄를 범했으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토록 무서운 고통을 나에게 감당케 하셨는가 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 말이라 한다.
그는 또 이어서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는 이 말에 의해 자신의 무죄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호소하는 "허물"이란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며 "죄악"이란 죄를 품은 마음의 상태라 한다.
개개인의 죄, 윤리적인 죄는 범하지 않았어도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등을 돌린 상태임을 인식하고 그 죄를 자각함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다.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윤리적인 죄밖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슬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이 죄의식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죄사함받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지 않는 한, 인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