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는 행하고 해야만 할 것은 하지 않는지요?
목회상담
우리 모두가 자신과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해봤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중적인 곤경을 그의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하고자 원하지 않는 마음보다는 하고자 원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매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비만한 사람이 자기가 과식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과식하는 이유가 뭘까? 만일 그런 잘못을 한다면, 그들은 자기도 체중을 줄이고 싶지만, 정작 결단의 순간에는, 즉 먹느냐 마느냐는 순간이 닥치면, 그순간 굶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해 버리며, 그래서 먹는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항상 그 순간 가장 큰 욕망에 따라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의 수준은 변화한다. 사람이 배부르면, 절식하는 것이 쉬워 보인다. 그러나, 배고프게 되면, 절식은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음식을 바라는 욕망이 갑자기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식하려는 욕망을 제압해 버린다.
우리들 각자 안에는 욕망의 갈등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타락한 본성의 일부인 사악한 욕망이 존재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또한 새로운 욕망, 곧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바라는 경향을 갖게 된다. 여러 면에서, 인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는 복잡하게 되지 않는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행하는 일과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행하는 일 사이에서 욕망의 갈등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모든 문제는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새본성을 강화하고 옛본성을 죽일 수 있는가? 이것은 일생에 걸친 투쟁이며, 즉 우리가 선한 욕망을 부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수많은 비만체질의 사람들이 체중빼기 운동가 모임같은 모임에 소속됨으로써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고 함정을 피할 수 있도록 욕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음식먹는 습관에 관한 전혀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훈련받고 지도받는다.
이것은 영적 성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새본성을 지속적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고 부른 것인데, 즉 옛성품을 죽이는 것, 다시 말해 굶겨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으로써, 교회 출석에 충실함으로써, 은혜의 수단 안에 깊이 들어가 지냄으로써, 새본성을 부양시킨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해지기를 기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할 실수이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미 완전에 다다랐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를 속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약화시켜 적용시켜야만 할 것이다.
분명히 중생한 날로부터 영광에 들어가는 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발전해 나가야 하지만, 완전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이 지상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또한 싸워서 할 마귀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다. "마귀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어!" 그러나 실제로 죄를 범하는 것에 있어서는, 비난은 100프로 인간이 받아야 한다. 마귀는 시험하고 유혹할 수 있으나,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마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사로잡는 것인데, 그러나 만일 그럴 경우, 성령께서 그 그리스도인 안에 사실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성령이 우리안에 계시기에, 마귀는 밖에서만 시험할 수 있고, 우리를 사로잡거나,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니 마귀가 시켰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혹은 태초의 인간 하와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설득하려고 매우 애를 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험하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 인간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킬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