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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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강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묵도, 13(64), 사도신경, 교독(82), (249), 기도, (288), (550), 헌금, 54
"(빌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영광(dovxa)은 (dokevw생각하는 것, 의견)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께서 내게 가지시는 기쁘신 감정입니다. 찬송(e[paino")은 (ejpi~위에v)와 (aijnevw찬미하다)의 합성어로 찬미, 찬양을 의미합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 때 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의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갈 5:22,2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였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의의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에게서는 찬양이 터져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영광과 찬양은 교회가 가지는 신앙고백으로서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보람과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제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스도의 내재(內在)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맺어지는 의의 열매가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게 할뿐입니다. 성도가 의의 열매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고 마땅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목적은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송을 돌리는 것이고, 사람의 삶 가운데서 맺게 되는 의의 열매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라 불리우는 자들조차도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재물, 쾌락 등을 복으로 알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되는 것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출세하고 권력을 가지면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내 공로, 내 힘, 내 의가 아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의로워지게 되고, 구원함을 얻고, 거룩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사는 것으로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상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삶입니다. 크고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 아무리 큰 재산가가 된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습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여러분들이 이룬 그것들 때문에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부엌에서 또 일터에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섬기는 여러분들을 기뻐하십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같은 버러지 같은 존재들을 보시고 왜 기뻐하시는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이 나를 기뻐하시니까 그저 감사하고 감동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서 불레셋의 용장 골리앗을 죽일 때 그가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골리앗아,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평소에 양치기할 때 지니고 다니던 누가 봐도 용장 골리앗 앞에 무기라 할 수 없는 물맷돌 몇 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골리앗 앞에 당당히 섰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고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다윗은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평안했고 든든했고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열매가 그 앞에 놓여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의 빛이 되시고, 그의 능력이 되시고 그의 반석이 돼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이 승리를 안겨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자 다윗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도망친 때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골리앗의 칼로 무장합니다. 그가 얼마나 그 칼을 의지했는지는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삼상21:9하).' 말이 그 증거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당장의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칼 곧 세상을 의지한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그 옛날 골리앗이 의지했다가 다윗에게 당했던 그 처참한 결과를 다윗 자신이 그대로 당한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안까지 멸문지화를 당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화를 당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과 다윗왕의 멸망을 상징했습니다. 다윗의 불신앙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이웃에게까지 큰 재앙을 안긴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다윗의 무너짐은 극에 달하여 원수의 나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여 거기서 미친 짓까지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를 죄에서 꺼내셨고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일어섰습니다. 그는 넘어져서도 기도하며 찬송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어섰습니다.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리, 그 비참한 자리에서 아주 넘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 일어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몸서리쳐지는 실수를 거듭했었습니다. 그는 분별력을 잃었고 진실을 떠났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으켜세움을 입었고 하나님은 그를 크게 쓰셨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 하셨도다(시 34:5-6)."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의 삶에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환난과 실수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다윗도 넘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일어섰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조건을 다윗에게 주셨고 그 결과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베울 게 이겁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나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도의 영광과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마한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방관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우리의 작은 삶의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미가 아기의 작은 동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우리의 아주 작은 선에도 민감하게 기쁨으로 반응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이나 자신을 의지하면 거기서 끝장입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 아이들도 인간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아이들로 키워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동거하심으로 우리를 일깨우시고, 우리 곁에는 생명의 말씀 성경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다윗의 절반의 노력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성도가 자기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으로 더 많이 일하시게 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수고의 열매입니다. 열매 가득한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추수하는 분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열매만 원하시기보다는 그 열매를 맺기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는 삶의 모든 과정을 더 기뻐하십니다. 결국 의의열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행하는 성도의 모든 삶의 과정과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가 은혜로 행하는 선물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뜻을 따르는 행위들로 맺어지는 풍성한 영적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애써야만합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만 있어지는 행위의 반응들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자신의 실력으로 이런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들입니다. 성도는 이 향기로운 열매를 통해 자기 이웃들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끼쳐야합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성도다운 반응들을 통해 의의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의의열매가 풍성한 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9절에서 시작된 전체 기도내용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함으로써 그의 기도를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열매들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때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서는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도의 영원한 찬양의 주제요 성도의 삶의 목적 자체입니다. 성도가 맺어야 하는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뿐입니다(11절). 이 열매는 포도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그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성도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만 맺어지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성도라도 사탄에게 순종하면 악한 열매가 맺어지고 주님께 순종하면 의의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께만 순종해야 합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의의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의의 열매 맺는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여 사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은 의의열매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의지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짐으로 나도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윗처럼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해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고백함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를 그 구렁에서 반드시 건져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자비하신 응답을 통해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생명의 세계에서 주님 앞에서 사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나 좌절 할 수밖에 없는 그때 정말 두려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환난의 때 시련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만이 신뢰할 때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배우자나 목사에게도 털어놓기 싫은 아픔과 시련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자신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때에라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순종하여 성실하게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주의 종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사 영광의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이르고의 의미)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의 날'과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연결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직고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인간들은 영생과 영벌로 나뉠 것입니다. 자기 의로 살려는 자들은 예외 없이 영벌로 떨어질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로 심판의 불을 면할 자는 없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을 회개시킬 능력자라도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라도 절대로 안 됩니다. 구원의 영광을 누릴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자들뿐입니다. 그날에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 얻을 의가 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노래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성도들만이 그 영광스러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누구라도 입을 열어 찬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완고함이 녹아지게 되고 우리의 자존심이 버려지고 우리의 영광과 어리석은 교만이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중심으로부터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찬양은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감격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영원히 들어가는 찬양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현명하다고 여기는 부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겸손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슬기를 더해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깨닫고 거기에 감동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어떤 시인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감격 그 자체뿐입니다. 다만 그 깊은 감동이 노래로 기도로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있고야 진정한 찬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이 다르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돈과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이나 쾌락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슬픈 비극입니다. 그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고 모두 함께 망하자는 것입니다. 가정을 망치고 인간을 파멸시키는 마귀의 무기는 바로 돈 사랑, 자기 사랑, 쾌락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돈과 쾌락을 멀리하고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성도는 아무리 억울해도 이웃의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영광과 존귀, 감사와 찬양 등, 그분께 합당한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떠는 가운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보다 오히려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사람들 앞에서 불안에 떨고 굽실거리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을 섬기는데 정신을 파느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권세를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잠재움으로 불의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외에는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두려움을 아시지 않습니까? 혹 애인의 눈밖에 날까보아서, 혹 애인이 싫어하지나 않을까 해서, 혹 애인이 날 미워하지나 않을까 해서 얼마나 많이 두려워했습니까? 우리는 그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힘껏 하려고 애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행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부부사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따라야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분이 나를 보고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나를 그리스도이신 자기를 닮은 자로 키워내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때로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시비를 일삼는 이웃을 만나게도 하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자식이나 며느리나 악당을 내 주변에 놓아두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사랑과 용서를 훈련받는 것입니다. 악당에게 시달리고, 있는 재산 다 날리고 도저히 평안도 기쁨도 누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가게 하심으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다가 사랑과 용서를 훈련받으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속에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악당이 있고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참아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마침내 나도 남을 오래 참고 기다려줄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십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죽이신 그 주님은 나도 남을 위해 죽게 만드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가도록 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평생 맺어야 할 최고 최선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열매는 없습니다. 이 열매를 위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에는 세상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는 많은 데 하나님보다는, 목사나 장로나 교회가 자기 영광을 구함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숨기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가정도 나라도 교회도 잘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는 길은 땅도 돈도 아니고 출세나 권력도 아닙니다. 인간의 사는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있는 자가 됐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임을 안다면 좀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겸손히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부부 사이에 있어서, 교인들 사이에, 직장 동료들 사이에, 이웃 주민들과의 사이에서 작년 한 해 동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변한 것이 없다면 변해야 하고, 변했다면 더 많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씨름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지는 밀알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아픔이 있고야 의의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을 거두고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사랑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기쁘도록 사는 것이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불신자에게는 심판이요 멸망의 날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영광의 날이요 영생의 날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찬양을 받으시는 날입니다. 그 영광과 찬양의 날을 위하여 참고 인내하면서 진실하여 허물없이 살기로 다짐하시고 또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리스도를 부끄러움 없이 찬양으로 영접하시는 자랑스러운 성도님들이 다 되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