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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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강, 이웃과 후손을 위한 기도.
185(311), 사도신경, 369(218), 기도 483(539). 설교, 484(365).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 어머니가 딸아이를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네가 부엌에서 과자를 훔쳐 먹었는데 훔쳐 먹을 때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러니까 이 아이 대답하기를 "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늘 지켜보고 네 마음속까지 다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그랬습니다. 꼬박꼬박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다 못해서 "그럼 네가 과자를 훔쳐 먹을 때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물었습니다. 이 딸아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던 걸요.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이구나. 그러니 두 몫을 훔쳐라.'" 어린 아이는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뭐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이롭게 해석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특성입니다.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절대로 참지를 못합니다. 둘 중 하나를 남에게 양보하지를 못합니다. 둘 다 내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어린 아이 시절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기심이 이타적으로 바뀌고 자기중심이 이웃중심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자라가면서 자기인식이 넓어지고 커져야 하는데 좀처럼 바꾸지 못합니다. 아이들처럼 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물질을 받았으면 축복이고 못 받았으면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적이고 순간적입니다. 보다 더 먼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조차 좀처럼 바뀌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기만 변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인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 같은 교회를 바라보면서 저는 제 어린 손자손녀들이 걱정입니다. 새삼스럽게 걱정되는 것은 제 가슴 속에 커가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난 알지도 못했고, 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저는 정말 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자손녀들이 자라는 것을 보니 그들의 미래가 염려되는 것입니다. 이제 좀 철이 드나 봅니다. 손자손녀를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기도 하지만 왠지 걱정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 살게 될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녀석들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같은 저의 두려움은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주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 (diafevrw)은 (dia~을 통하여, ~동안, ~와 함께, 때문에)와 (fevrw다스리다, (고통을)참고 견디다, ~앞으로 가져가다, (불평불만을) 발하다)의 합성어로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길게 그 의미를 추적해보았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단순히 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나를 화나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약 올리는 원수의 도전이 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 상대로 인해서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불평불만들을 참고 견디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통을 다스리고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선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말들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모두 다 이 선에 모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성령의 역사입니까? 참으로 신비롭다는 말로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일점일획이라도 빼고 더하려는 자는 사탄의 무리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한 영혼을 구해내는 싸움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 편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고 손 놓고 발 묶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라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에게 사기를 치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동원해서 우리를 이리저리로 몰아 부칠 것입니다. 그 유혹에 걸려들면 아무리 우리가 성도라도 밤을 설치며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도전해오는 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세운 존재들인 것을 세상과 다른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뛰어난 세상을 능가하는 존재들인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diafevrw)'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제 나이 벌써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을 지금까지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횟수를 조금씩 줄여가고 있을 뿐입니다. 사탄이 우리에 비해서 비할 수 없이 간교하고 지혜롭고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그 사탄과 싸우면 백전백패할 수 없도록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탄을 이길 힘을 누군가로부터 빌려오면 더구나 그 힘이 사탄을 언제나 이길 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사탄을 반드시 이길 능력인 성령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해 싸우는 것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우리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예방주사를 아시지요? 우리는 사탄에 대해서 이길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핵예방주사는 예방주사를 놓기 전에 결핵균이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도록 죽지 않을 정도로 결핵균을 지치도록 만듭니다. 그 지친 균을 주사를 통해 우리 몸에 넣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몸의 백혈구가 좀 고전은 하지만 그 힘이 빠진 결핵균을 잡아먹게 함으로 병균을 이길 힘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핵균에게 한 번 이긴 백혈구는 그 다음에는 건강한 결핵균이 들어와도 아주 수월하게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사탄과의 싸움에도 이것이 적용이 됩니다. 사탄은 그가 비웃고 조롱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를 맛본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방식으로 대적하기만 하면 무섭지 않은 척 대항해 오기는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돼있습니다. 그렇다고 나무 십자가를 들이대라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잡고 있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주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늘 가동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을 상주시키고 있으니 사탄이 우리를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믿고 십자가를 담대히 지고 포기하지 않은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 이기면 다음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 번이기면 그 다음에는 겁을 내기보다 오히려 신나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는 회수하고 세상의 권력 명예 돈부터 동원해서 손에 쥐어줍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사탄의 종노릇에 익숙해져서는 사탄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는 그 방식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짓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짓부터 합니다. 악당은 처음에 길을 들여 놔야한다면서 악당이 칼을 들고 나오면 총을 들어야 한다고 부추깁니다. 결혼하는 자녀들에게는 기선제압을 잘해야 결혼생활이 편하다고 가르칩니다. 상대야 망가지든 피멍이 들든 상관이 없이 자신의 손해를 줄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동원합니다. 얼마나 간교하고 약삭빠른지 모릅니다. 악당은 악당이니까 벌 받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은 전당하니까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당에게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져야하는 쪽은 악당이니까 정당한 자기는 절대로 질 수 없다고 악악대고 싸우는 것을 보면 악당의 뺨을 칠 정도입니다. 악당이 회개를 하면 자기가 선하지 않은 것이 발각될까 보아서 악당을 더 악당 되게 약을 올립니다. 그래서 상대가 악당으로 있는 것이 자신이 선하다는 증거로 내세우려는 것입니다. 제가 거짓말 하는 것 같지요? 그 증거요? 제가 그래봐서 너무나 잘 알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예방주사가 아니라 지는 예방주사를 맞은 자들입니다. 작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갓난 아이 같은 어린 신자들이 새로 나오면 그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데 흠집을 내는 것은 이미 틀에 박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살고 있는 교회의 어린애 같은 어른들입니다. 어린 성도들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기보다, 성경이야 뭐라 하던 자기들 취향에 맞추어 두들기고 구부려서는, 자기 욕심과 자기 사상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먹이에 굶주린 뱀의 혀 같습니다. 어린 성도들의 발 앞에 웅덩이를 파고 입을 벌리고 있는 굶주린 사자들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을만한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자랄 싹을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화가 나도 지고 당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절대로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어찌하든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저 또한 그들 중 하나는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손자손녀들에게 그들의 시대를 바로 볼 눈이 뜨이고 제 길을 바로 택해 당당히 걸을 수 있는 지혜 갖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이 악한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선택이 그대로 여러분 자녀나 주변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처한 환경이 그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염려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바울을 핍박하는 자들은 감옥 밖에서 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간 바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난 듯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이 낙망을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또 빌립보 교회의 장로들과 집사들이 실망에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지도가가 보는 것이 그 무리 모두가 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절망을 보면 그 무리 모두는 절망을 보고, 지도자가 소망을 보면 모두는 소망을 봅니다. 엘리사가 사마리아 성에 있음으로 해서 아람군대는 백전백패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로 미래를 보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것을 본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겁에 질렸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엘리사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서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빌립보교회의 처지나 게하시의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엘리야의 종 게하시의 눈에 자기를 포위하고 있는 아람군대만 보였듯이 빌립보 교인들의 눈에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환경들만 보였을 것입니다. 게하시가 잔뜩 겁에 질려서 엘리사에게 달려가서 다급함을 보고했듯이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담대했고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승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전투에서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해 놓은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미래를 보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성도는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내 앞을 바로 보지 못하면 나만이 아니라 내 이웃과 교회와 그리고 내 가족이 함께 피해자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자기들에게 현재 처한 싸움이 자기들이 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싸움은 자기들이 승리한 싸움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섬세한 손길로 그들의 닫힌 눈을 일일이 열어 그들 앞의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신자라도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대관령을 넘기 전에 사고 차량과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차를 운전하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없게 해달라고 악악 기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가 나를 죽여 쓰실지 살려서 쓰실지, 높여서 쓰실지 낮춰서 쓰실지, 그건 전적으로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날 인도하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의연하고 당당하게 처신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내게 가장 선한 길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멀리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고 또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현실과 물질이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들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현실은 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불신자가 듣지 못하는 걸 듣고, 보지 못하는 걸 보고,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승리를 보면서 소망 중에 사는 자들입니다.
지도자는 앞을 보고 미래를 보면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적어도 성도만은 이를 위해 잠을 설치면서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현재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상속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나 자신에게는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자의 삶입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내가 기도하노라." 말함으로 그의 문제를 기도로 풀어가고 있음을 보였습니다. 성도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나라를 위하고 지도자를 위한 기도는 기본입니다.(딤전 2:l-2).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며 모든 사람들의 삶 전체에 선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나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를 너무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이유이지 그들에게 무관심할 이유는 결코 아닙니다. 가능하면 겸손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적어도 개인의 야망이나 정당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민 위해서라면 자신이나 소속 정당을 희생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업이나 군대 정치지도자에 대해서 많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절망까지도 느낍니다. 가정에서도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자녀들의 실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집에서 존경받는 어른입니까? 자기는 놀러 나가면서 아이들보고는 교회 가라는 부모, 하나님을 사랑하라면서 주일날에 열심히 이런 저런 행사를 참여시키는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입으로는 주일성수를 말하면서 주일에조차도 세상 것으로 경쟁시키고, 기도를 하면서도 입만 열면 돈 돈... 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까요? 문제는 어른으로서 선한 본을 보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성도답지 못한 삶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정치가나 기업가를 비난할 자격을 이미 상실한 자들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자랑스럽고 사랑할만한 지도자가 없는 책임은 바로 평범한 삶속에서 선한 본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믿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가정에서부터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증거해 보여야 합니다. 그 일은 남이 아닌 바로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자녀들에게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보여줄 때입니다. 오늘 당신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게 할 것입니까? 세상 것입니까? 영의 것입니까? 눈앞에 것입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집에서 동생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동생은 자기가 거짓을 행하지 않았다고 우깁니다. 형은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그 증거를 들이대면서 동생을 몰아 부칩니다. 동생이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할까요? 아닙니다. 부모를 동원해도 안 합니다.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자백을 하면 자기가 진다고 생각을 하니까, 악은 절대로 지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매가 무서워서이지 죄를 회개하거나 잘못을 뉘우쳐서가 아닙니다. 결국 형은 자기의 정당함 때문에 동생을 더 악하게 몰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속아주고 당해주고 져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억울하고 손해가 보여도 상대가 분명히 악하다는 것을 알아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을 어려서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동생과 사랑이 무르익었을 때 자기가 다 알고 져주었다고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말해주면 동생은 '그런데 왜 속아줬어!' 물으면서 미안해하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을 깨달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랬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남의 허물을 들추기보다 덮을 줄 알아가게 되고, 그때부터 형의 권위는 저절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식과 총명으로 하나님의 가장 은밀한 것까지 사모하며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모두를 보고 지혜롭게 분별할 영의 눈을 자녀들에게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신의 삶으로 성경을 번역해내는 일입니다.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난세에서 자신과 그리고 교회와 이웃들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져야하는 공동의 짐입니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그를 이해해주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가 그 일로 인해 절망하기보다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는 지고 당하고 망하면서도 억울하고 원통해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본을 보이도록 도와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치료하고 살리면서 함께 성숙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가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의 말 한 마디는 큰 위력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저마다 일등을 하라고는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책임을 가르쳐야합니다. 당장 눈앞의 것에만 목을 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보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은 우리 교회나 부모들이 자녀에게 거는 기대와 교육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비난하고 욕할 염치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위해 사람이 필요하지만 함께 살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멀게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가깝게는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도 우리는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키워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들로 키워내야 합니다.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섬김을 받기보다 섬길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내야 합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로 일하게 하는 아이로 키워내야 합니다. 영·육간에 하나님만을 붙잡고 자라는 지혜를 갖게 해야 합니다. 군대의 표어 중에 "전군의 간부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대로 "모든 신자의 졸병화" "모든 가족의 졸병화"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졸병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종이 되어 섬기는 본을 보여야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손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성도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김으로 아름다운 본을 자녀들에게 또 형제들에게 보임으로 교회와 주의 나라를 완성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