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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서른 개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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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첫 보금자리를 꾸몄을 때 우린 백서른 개의 계단 바로 옆에 살게 되었
다.
그런데 이사한 첫날부터 그 높은 계단 때문에 대단히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하
다못해 라면 한 봉지, 볼펜 한 자루를 사더라도 천상 백서른 개의 계단 위에 있는
시장엘 가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로 지척인 시장을 놔두고 멀고
먼 딴 시장을 이용하는 것도 무리인 것만 같아서 나는 짜증나고 힘이 들어도 그 계
단을 오르내렸다.
더욱이 홀몸도 아니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것이 블안하기도 했지만
기도 했지만 평소 그 계단을 한꺼번에 두 단씩 뛰어올라 다니는 그이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잘됐지 뭐, 적당히 운동을 해야 뱃 속의 아기도 커지지 않아서 낳을 때 편할 거
야."
물론 돈이 부족해서 그렇게 불편한 지역에 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쿵저러
쿵 불평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계단을 하나 둘 헤아리며 올라가다가 숨이 차오
면 몇 번씩 쉬곤 했다. 그러다 가까스로 그 계단의 정상에 오르면 마치 등산가가 바
라던 산꼭대기에 등정을 한 것 같은 뿌듯한 감회가 솟곤 했었다. 또한 확 트인 공간
의 시원한 남풍은 내 이마의 땀을 씻어 주었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망망한 부산만
위로 조각배며 기선들이 유유히 떠 있어서 좋았다. 내 고향 제주도의 바다처럼 늘
푸르진 않았으나 그 부산만을 보면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바다를 본 듯 왈칵 반가움
이 솟곤 했다.
그렇게 무려 백서른 개의 계단을 만삭의 몸으로 하루 한 두 차례씩 기어올라 그이
의 맛있는 저녁상을 위해 요것조것 쬐끔쬐끔씩 다채롭게 바구니를 채우고 내려오는
나의 모습을 간혹 스스로 들여다봤다. 우리의 결합을 무척이나 염려하셨던 친정엄마
가 이런 내 모습을 보셨더라면 틀림없이 눈물지으실 것이라 느꺼워하며 제풀에 눈물
까지 글썽이곤 했다.
그러나 그 시절 난 충분히 행복했다. 아침에 그이를 배응한 후, 종일토록 저녁엔
무슨 요리를 만들어 그이를 기쁘게 할까 하는 데만 마음을 썼고 저녁이면 불 꺼진
외등 밑에서 그이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해 여름, 난 첫 딸을 낳았다. 백서른 개의 계단을 규칙적으로(?) 오르내
린 덕분인지 몰라도 무난히 순산했다. 올해 열일곱 살, 차돌같이 단단하게 자란 딸
애를 바라보면 문득 가파른 계단을 열심히 오르내리던, 배불뚝이 나의 모습이 저절
로 떠오른다.
비록 지금보다 더 가난했고, 아무런 세상물정 몰랐던 애송이 주부였으나 가난함
속에서도 웃으려 했고 진한 행복을 느끼려 했던 그 시절.....
때때로 더 편하고 좋은 생활에 욕심을 내다가도 얼른 그때를 돌이키면서 분수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백서른 개의 계단. 그것은 내 인생의 희망봉으로 가는 항해지도였다.
양기숙/서울시 양천구 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