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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강, 의의 열매. 


169(182), 172(183), 260(496), 378(426), 


(빌1:9-11).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의 기도 중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할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할 것에 대해서 그 낱말 하나의 의미를 살펴가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둘의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날 '의의 열매가 풍성'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입니다. 여기서 의는 (dikaiosuvnh)는 (divkaio",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열매(karpov")는 좋든 나쁘든 간에 착수한 일의 결과를 뜻하는 성과, 결과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칭의의 결과로 얻어지는 선한 열매 곧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풍성하여(plhrovw)는 '가득 차게 하다, 즉 꽉 채우다, 평평하게 하다, 또는 주다, 만족하다, 수행하다, 미치다, 확증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만기되다, 공급하다.' 등 그 의미가 말 그대로 풍성합니다. 

그 의미를 대강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인간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으로 죽어있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영적으로 죽어있었던 시체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었고 확증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 우리가 칭의를 받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도의 참 지식이고 이 사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사는 것이 성도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 지식과 지혜를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달할 최고의 수준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의 열매를 맺는 방법은 언제나 예수님이 의를 이루신 방법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말고는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의'와 '열매'와 '가득하여(풍성)'의 세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롬 12:1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산 제물로 드리라(parivsthmi)는 것은 자신이 제물인 것을 증명해보이라는 것입니다. 산 제물은 지금 살아있는 제물입니다. 제물이란 죽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일회성인 죽은 제물이 아니라 영원한 효력을 가진 제물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제물이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날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 내 안의 그리스도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살아 움직이면서 생활하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흠 없이 바치라는 것입니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날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위임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사는 삶입니다. 나를 죽여 내게서 그리스도만 일하시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처분에 맡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나를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의롭지 않고는 나를 하나님께 드릴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응답을 받아내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여 하나님께 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제사행위이고 예배행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에 따라 어느 순간에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만 요구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삶과 예배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바로 삶입니다. 내 몸을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내 생애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전 생애를 그것도 나를 억울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약 올리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항상 긴장을 풀 수 없는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가능한 삶이겠습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로 흘려보내고 싶을 것입니다. 양육강식의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도 억울해서 칼이라도 품고 가야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십자가라니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할 수 없고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실제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식민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폭력과 권모술수로 해결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사는 시대였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화나게 하고 억울하게 하는 일이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끊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도 내가 뭔가 실수를 해서도 아니고 상대를 억울하게 한 것도 아닌데 핍박을 가해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핍박을 해온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게다가 그 핍박을 가해오는 자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는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의 추종자들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로마인들에게 당하는 고통보다도 더 화나고 억울할 것입니다. 그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일깨운 후에 세상이 너희를 어찌 대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십자가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사는가를 깨닫기 전에는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보내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할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로는 우리는 그들과 도무지 경쟁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만이 가진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이 불신 시절에 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없는 게 당연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만 영생이 있고 길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이 빛을 발하면 세상은 회개하고 빛으로 오거나 아니면 우리를 더 핍박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들의 더러운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기 싫으면 함께 어둠에 거하게 하려고 빛인 우리를 죽여서 세상을 어둡게 하려는 것입니다. 빛을 아예 꺼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빛을 계속 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잊어버리고 단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다 떠넘기고 원망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영생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고도 그 은혜와 사랑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 무지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질 지식이 이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춘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더욱 풍성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시련이나 환란에서라도 우리는 그 시련을 자신에게 안겨준 악당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깨어짐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통회자복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열망하는 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는 어떠한 모양으로든 반드시 꽃을 피웁니다. 그것이 화려하든 보잘 것 없든, 크든 작든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가 꽃을 피운 증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삶의 꽃을 피우고, 그 꽃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가짜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버리듯, 하나님은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백성들을 버리실 것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2)."라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려 구하고 애쓸 때, 하나님은 더욱 크게 성장하도록 우리를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더욱 받아 풍성해지고, 과실을 맺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지 못한 채 무익하게 되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열매는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간 나의 거룩함이고 내가 비춘 사랑의 빛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우리의 지체된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수많은 사건과 사고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심심해서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나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키워내시려는 사건이고 사고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때로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시비를 일삼는 시누이를 만나게도 하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며느리나 악당을 우리 주변에 놓아두기도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미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훈련받는 것입니다. 악당에게 시달리고, 있는 재산 다 날리고 도저히 평안도 기쁨도 누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굴러가게 하심으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다가 그 속에서 사랑과 용서를 훈련받으면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도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참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마침내 나도 남에게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성품을 내 안에 만들어 내십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죽이신 그 주님은 나도 남을 위해 죽게 만드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갈 것을 그가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평생 맺어야 할 최고 최선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평생 삶의 목표입니다. 그 이상의 열매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행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부부사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따라야합니다. 저는 자주 아내 얘기를 잘 안 듣다가 핀잔을 듣습니다. 일에 열중하고 있는 데 '여보 나 좀 봐요.' 그러면 하던 일에서 눈도 안 떼고는 '응, 응..' '아! 나 좀 보라니까요!' 그럴 때에야 정신이 퍼뜩 들어서 '아, 미안해요.'를 몇 번 연발하고야 용서를 받습니다. 아내 말 잘 들으면 반찬이 달라지고 대우가 달라지고 써비스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누구의 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 그게 기도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 제가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삶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5:22-25). 그 열매는 과일이 껍질이 벗겨질 때 더 짙은 '향기'를 내듯 인생도 상처라는 아픔을 통해서 짙은 향기를 풍겨나는 법입니다. 미움에서 피어난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전쟁 한가운데서 피어난 평화가 더 빛을 발하며, 쓰라린 박해와 고통 속에서 피어난 오래 참음이 그 향기를 더하는 법입니다. 

이 열매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 성도다운 경건한 반응으로 풍겨나는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 모든 과정에서 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냄새를 맛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올지라도 지고 당하고 망하면서도 섬기는 지극한 사랑으로 응답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열매를 맺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의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맺어지는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살 때 그가 우리에게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나를 100% 복종 시킬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 당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향기로운 열매가 맺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요 15:1,4,5). 불신자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불신자도 겉으로는 착한 일을 행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고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법이 없이 사는 사람은 깡패고 강도들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의 모든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치 몸에 걸친 똥 걸레에 불과할 뿐입니다. 몸에 똥 걸레를 걸치고 청소를 한답시고 안방, 거실, 부엌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녀 보십시오. 그가 지나간 곳은 온통 똥냄새로 엉망이 될 것입니다. 옷도 몸도 깨끗이 빨고 씻기 전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의 죄를 씻김 받기 전에는 누구나 썩은 냄새를 풍기는 시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가 맺을 열매는 송장냄새 말고는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인간의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 내 감정, 내 느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 내 사랑은 기껏해야 내게 누가 욕을 하면 배나 더한 욕으로 갚아주고, 내 뺨을 때리면 발로 차고, 칼로 덤비면 대포 들고 덤비는 것이 내 실력입니다. 그럴 실력도 없으면 아예 실망하거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 자살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의열매는 성도들만이 맺을 수 있고 또 반드시 맺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조건도 없이, 상대가 내게 행한 것에 상관없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퍼주는 사랑입니다. 상대가 내게 악한 동기로 접근한다 해도,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해도 무조건 섬기고 져주고 퍼주는 것입니다. 억울하지만 참고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새는 기도는 성도가 치를 필수과목입니다. 그것이 있고서야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속임도 당하고, 손해 보고, 바보 취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과 한숨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한숨이 아닙니다. 모두 상대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감정적이지만 그러나 성도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의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억울하게 행동한 상대를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하고 용서해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모두에게 그런 사랑을 보이셨고,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이 사랑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녹이는 사랑의 용광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를 향해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던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용서의 결과는 놀랍게도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의 열매입니다.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섬겨주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옥구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옥돌에서 둥글지 않은 부분을 사정없이 정으로 쪼아내야만 합니다. 그러고야 귀한 옥구슬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구석들을 사정없이 잘라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가정에서 어른들이나 아내나 아이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버려야할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입힌 상처는 없었는지?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서 고치셔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빠른 경제성장 만큼이나 원수가 덧뿌린 가라지도 빠르게 자라 부정부패가 만연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 뿌리내린 잡초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보다 모두 제 육체의 쾌락추구에 바쁩니다. 육체의 쾌락은 허무함과 썩어질 것을 거둘 뿐입니다. 성도는 그 육체를 희생시켜 땀과 눈물로 성령을 위해 의와 거룩과 사랑을 추구함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쾌락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영혼의 가라지를 뽑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싸움의 연속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면 얼마나 긴장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사탄이 제 아무리 우는 사자처럼 날 뛰며 달려든다 할지라도 마지막 추수 때에는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때때로 가라지의 기운이 우리들을 가로막고 빛을 가리우며 영양분을 다 빼앗아 가는 것 같아도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시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여 따르시기 바랍니다. "(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사실 '벤(아들)'과 '바트(딸)'와 '베이트(집)'는 동일한 어근 '바나(세우다)'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벽돌과 목재가 건물을 형성하듯이 실제로 아들과 딸이 집을 세우고 가정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선한 예배처소는 세울 수 없고, 하나님의 복을 얻지 않고는 평안하게 살 집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근심과 조바심, 고뇌와 두려움으로는 하나님께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기도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이룬 세상 것들을 자기들이 수고한 결과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평안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고가 허망하고 쓸모없는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서 그의 풍성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이를 믿으시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힘껏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밤이 어찌 평안이 없겠으며 찬양이 없겠습니까? 이를 믿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현시키는 일에 앞장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님들이 다 되어 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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