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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강, 풍성한 사랑을 위한 지식과 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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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강, 풍성한 사랑을 위한 지식과 총명.
46(31), 506(453), 102(94), 97(92).
(빌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옥중에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편지나 기도뿐이었습니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드린 그의 기도의 주제들을 9절에서 11절까지에서 세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에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이 더해져서 풍성해지기를 '항상' 간구했습니다(9절). 그는 편안한 때가 아니라 정말 힘 든 때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특히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지식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해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식(ejpivgnwsi"명확한 지식)을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한 지식의 반대인 명확하지 않은 인간의 무지를 먼저 아는 것이 순서입니다. 최첨단의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 말하면 제가 무지하다고 말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과 정보를 나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먼 곳에서도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들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초음속으로 나는 비행기를 유도탄으로 떨어뜨리는가 하면 그 유도탄을 쏘아 떨어뜨리기도 하고, 인간의 배아 줄기세포까지 조작해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들이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상)."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낡은 옛날 책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지식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먼저 성경이 말하는 무지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 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지적합니다.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의 참된 주님이십니다. 참 빛이신 이 주님께서는 어둠의 권세를 종식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는 바로 빛이신 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은 그 무지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유대인의 선생입니다. 선생은 요즘말로 하면 박사라는 말입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도덕과 지식과 윤리 특히 유대종교에 대해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남의 도움을 구하거나 아쉬울 것이 없는 신분과 위치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평가로는 전혀 부족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한밤중에 남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뛰어난 학문의 소유자인 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자타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어떤 조건으로도 구원받을 희망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니고데모는 너무 무지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말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였습니다. 배울 만큼 다 배운 그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까막눈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세상 모든 지식에 통달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면 무지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고 지금의 남편조차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그는 한 낮에 남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의식해서 남들이 물을 깃는 아침과 저녁을 피해 한 낮에 물을 길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나 하인들의 몫인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개만큼도 대접하지 않는 혼혈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그들의 집에 들이는 자가 있으면 그 집 아이를 노예로 삼도록 법으로 정할 정도였습니다. 이 천한 여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갈아 치듯 인생의 목표도 수없이 갈아치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유대인 예수가 접근해 오셔서 물을 달라하셨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앞에서 구원과 생명에 대해서 끈질기게 설득해오고 있는 예수님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누군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4장의 사마리아 사건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구원을 은혜로 제시해도 자기의 능력으로만 소유하려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넘치는 은혜로 충만하게 임해도 자기에게는 감당이 안 된다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고 누구도 좌절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지식은 무엇을 안다는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지식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지식은 자신에게는 구원을 얻을만한 근거도 없으며,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총명(ai[sqhsi")'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구하였으면 내가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구하기만 하면 구원도 얻고 믿음도 얻고 또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인이 예수님의 깨우침을 듣고도 영생의 생명수가 아닌 겨우 우물물이나 구한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원의 희망이 없기는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똑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음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넘치는 은혜를 감당치를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혜가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이 두 사건이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앞에 놓고도 그를 바로 깨닫지 못했던 근본적인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드러내고 싶은 자존심입니다. 죄인에게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꺾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예수님이 자신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미련하고 부족합니다. 악하고 게으릅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말보다 "하나님, 차라리 날 죽여서 지옥에 던지십시오." 외치는 것이 인간의 악한 자존심입니다. 한 번 확인해봅시다. 우리 모두는 회개를 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남의 돈을 떼먹고 회개를 하려면 먼저 그 돈을 갚고 와서 회개하는 것이 올바른 회개입니다. 잘못했다고 엉엉 우는 것으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I.M.F가 터지고 얼마 후 미국 어느 교회에서 제게 200달러를 보내왔습니다. 원화로 환불을 받으려니 가까운 곳에 외환은행이 없어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금왕읍에 있는 외환을 취급하는 모 은행에 가서 환불을 요구했더니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당장은 어렵고 수표조회가 끝나야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같은 수표로 다른 은행에서 당일로 환불을 받은 예를 대면서 따졌지만 담당직원은 막부가내였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나왔습니다.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하니 저 자신이 너무 한심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저는 자존심을 버리고 성도답게 반응했어야 했습니다. 저는 당장 찾아가 사과를 해야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하루가 더 걸렸습니다. 다음 날 담당자를 찾아가 사과하고서야 지점장의 사과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은혜를 입는데 장애물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남과 다투고 회개했을 때 그 당사자를 찾아가 먼저 화해를 청하거나, 자신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억울함을 누르고 용서와 사랑을 행하고서야 우리는 하나님을 조금 아는 자라할 것입니다. 결국 '지식'이란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깨달음으로 성도로서의 사랑을 확고하게 자리 잡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세상과 자신이 얼마나 악한 것을 알게 되고 매일매일 만나는 사건과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내는 총명(ai[sqhsi")이 제대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에 대해 이사야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고 탄식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그 수많은 기적들과 간섭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그 어떤 변화의 기색도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사1:10)"이라 불렀겠습니까! 결국 이사야의 결론은 "인간에게는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성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구원이나 생명이나 진리에 대해서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고 이를 아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바로 영접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죄인들의 대속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적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인간은 근본적으로 장님이요 무지합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기적이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이것을 능가할 특권도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가문에 입적된 우리를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지식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풍성한 사랑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사랑은 더욱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최선의 것을 이루었다 해도 거기에는 불완전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하나님께 근거를 둔 사랑은 완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은 헌금이라는 것으로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풍성 위에 풍성을 더하기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도 참을성도 없고, 또 이기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에 대해 가끔 실망합니다. "내가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울부짖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이 사랑을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우리 모두는 시작하신 것을 완성하시고야 끝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9절)'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한 것은 바로 이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의 사랑이 하나님 지식의 정도에 따라 증가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지식'은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충만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지식과 총명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지식에 근거할 때 비로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지식이 풍성해지면 풍성해질수록 우리의 사랑도 더욱 증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합니다. 우리는 매일 그와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자라가도록 약속되어진 축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지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어서 자신을 더욱 거룩으로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되고 보증된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 거룩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만이 아니라 거룩을 하나님이 보증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걸음마 수준에 있을지라도 실망하지 않고 내안의 하나님사랑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씨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식과 총명에 근거한 우리의 삶입니다.
이제 무엇이 참 지식인지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생명입니다. 나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해도 하루살이에게 내일일 뿐입니다. 내일을 살 수 없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있는 인생들입니다. 이런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고 다시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불어넣어 주어 살리셨습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최고 복은 바로 성령을 받아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으니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의 모든 것이 다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도 많이 받고 수양도 되고 고상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정도라면 짚신이든 잡신이든 무슨 상광이겠습니까? 아무 종교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시시한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인간의 최고의 소망인 영생을 얻을 수는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믿는 자에게만 성령을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생명의 역사야말로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신 역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이 복! 그것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총명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탄의 간계를 꿰뚫어 보는 것 또한 지식이요 총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따라서 어느 것이 누구의 음성인지를 분별하고,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희생은 피하라 속삭이고, 쉽고 편한 길만을 택하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사탄의 음성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내 생각에 좋은 것만 행하며, 조건이 붙은 하나님의 규례임에도 불구하고 조건은 없애고 결과만 믿으라고 권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100%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서야 비로소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죽음으로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저는 놀라운 그러나 서글픈 기사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평화 신문 1991. 12. 1일자 신문에 성 바오로 수도회 소속으로 꽤나 알려진 오세완 신부의 글입니다. 그 내용 중 "구원이 천주교 밖에도 있다는 이야기는 무신앙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본다. 비록 하느님을 알지 못했지만 착하게 살았다면 그는 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다만 일정한 정화의 기간은 보내야 한다." 말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말입니까? 구원도 영생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에 동조하는 신부나 목사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누구에게서 오고 영생이 누구에게서 오는지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그것은 영혼 사냥꾼의 간교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요, 그들 속에는 영생이 없는 자들입니다. 창조주이신 성령하나님을 은혜로 받은 자만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말고, 딴 구원을 말하는 것은 분명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총명이 필요합니다. 총명이라는 말은 영적인 통찰력과 민감성의 실제적인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총명은 영적지각의 예리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된 총명이란 결국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감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영적시각을 흐리게 함으로 윤리감각을 무디게 하고 심령의 눈을 멀게 함으로 '총명'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이 선악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지식과 사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는 사자같이 덤비는 사탄의 소굴 속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사탄을 대적할 칼이요 방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융합된 지식과 총명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밖으로 꺼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라 꺼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웃사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한 자라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이웃 그것도 원수 같은 이웃들에게 내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기독교 최고의 사랑인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대적들에 대해서응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무기는 세상의 물질이나 세력이나 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세상이 칼을 갖고 덤비면 나도 칼을, 세상이 총을 들고 덤비면 나도 총을 들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무기는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적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주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식과 총명(9절)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10절)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 심판을 의식하면서 딴 무기 사용할 엄두도 내지 말고 십자가로만 응전하면서 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허락된 재능과 은사 물질 그것이 무엇인 됐든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까지 병든 자, 고아와 과부 이웃들을 섬기는데 사용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스런 몸으로 재림하셔서 선과 악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던 주님은 초림 때와는 달리 재림하실 때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천사장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가지면서 그가 가신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감사하면서 간 자들은 양떼로 구별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내세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한 자들은 염소 떼로 구분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이것을 알고 심판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을 예비하며 사는 자가 진정으로 사랑과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입니다. 이것을 예비하지 못하는 사랑과 지식과 총명은 그 어떤 최고의 것이라 해도 심판 날에는 불길에 사그라질 낙엽에 불과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영원한 형벌의 날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지식과 총명이 있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이 성도 여러분들에게 차고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