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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강, 우리 모두 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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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강, 우리 모두 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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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선교사와 표범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가 어느 날 표범을 만나 쫓기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표범이 기독교인으로 변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표범이 무릎을 꿇더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아전인수적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이기적입니다. 오죽하면 '머리털 하나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아니하겠다.'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성경 말씀조차도 "성경이 무엇을 요구하느냐?"에는 관심도 없이 모두가 자기 좋은 대로 써먹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나만 있고 이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경제적인 위기도 아니고 정치력의 위기도 아닙니다. 오늘의 문제는 나만 있고 우리를 상실한 '비인간화'된 사회입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이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가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지 도무지 감각도 없습니다. 남에 대한 비판은 차고 넘치는데 자기를 향한 통찰도 애통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이런 교회를 위해 엎드려 통곡해야 합니다. '나의 성도답지 못함'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답지 못하고 내가 성도답지 못하고 이웃을 잃어버린 나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됨을 바로 알고 지체로서의 역할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설 수 있으며,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 25: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나의 나 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이를 아는 자들만이 주님의 뜻을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함께 참여한 자(sugkoinwnov")'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말은 (suvn함께, ~와 함께)과 (koinwnov"공유자, 함께 하는 사람, 분배자)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좀 길게 해석하면 '~함께 공유하고 분배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 시간에 '내 마음에 있다'에서 '있다(e[cw소유하다, 가지다)'를 어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이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어미와 아기의 관계에서의 공유와 분배를 통해 본문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공유라는 것은 무엇을 함께 소유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화장실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한 가족이 됐다거나 그들 사이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화장실을 함께 쓴다고 해서 기족들이 마음을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공유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가 예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합니다. 8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예수의 심장이 아니고는 둘이 하나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인이 모두 예수의 마음을 가진다면 천이라도 하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 젖먹이 아기를 가진 어미의 심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미는 아기의 그 어떤 방응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밖에는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어미의 기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기의 웃음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똥오줌까지 어미에게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기는 어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맡긴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준 것이 없지만 아기는 어미와 사랑을 공유함으로 그 사랑을 어미와 나누고 온 가족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가 그 사랑을 하나님과 공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아기가 어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절대의존적인 삶입니다. 그 공유된 사랑을 통해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고 이웃과도 그 사랑을 분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사랑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저는 그 사랑은 만유와 만인을 품는 마음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도 그 사랑의 대상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리(pa'"만유, 만민, 전체)라는 말로 피조물 전체를 모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성경을 볼 때 앞뒤의 문맥을 따라서 같은 낱말이라도 그 해석을 달리해야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어를 살피다 보니 '참여하다'와 같이 공유와 분배라는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유한 자는 동시에 그 사랑을 분배해야 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성경이 짧은 글 속에 그 풍성한 내용들을 다 담아내려니까 단어 하나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준비하셔서 그 풍성한 내용들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살피고 있는 세 단어도 그런 맥락에서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사랑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이 만유와 만인 모두를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한 교회를 위한 것일지라도 바울의 마음 밑바닥에는 피조물 전체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내보일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열을 품었어도 서너 개를 내 보일 수 있으면 천재입니다. 만약 바울이 만유와 만인 전체를 품지 못했다면 한 교회의 사랑 또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창조주 예수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이 사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기를 키워보신 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아기가 이가 나기 시작하면 어미의 젖꼭지를 자주 물어댑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처음으로 젖꼭지를 무는 날의 어미의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아기라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연한 젖꼭지를 물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아기가 젖꼭지를 물면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제일 먼저 뱉어내는 소리가 "여보! 얘가 내 젖꼭지를 물었어!"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아픔과 기쁨과 감격이 어우러진 묘한 표정입니다. 이게 뭡니까? 자기가 당한 아픔보다는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를 본 것이 너무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미가 아기에게 가지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저는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이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보인 사랑은 아주 작고 받은 상처도 있었겠지만 바울은 그들에게서 성숙해가는 자녀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코 완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기는 어미에게 아장아장 걸어오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어찌하든 빨리 어미 품에 안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순종해가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조금씩 다가오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점차로 자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과정을 보시고 싶으신 것이지 완전한 나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미련과 부족과 실패까지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주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피조물 전체를 품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함께 자라갈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 사랑의 기초 위에 서야 하고 그 사랑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함께 자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만유와 만인 모두를 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만인을 품지 못하니까 인간들이 스와핑 같은 동물문화에 만들어 내고, 만유를 품지 못하니까 자연재앙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 자연재앙을 만들어 낸 것은 선진국들인데 그 책임은 후진국들에 다 뒤집어씌우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동물이 오늘의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곡물의 종자까지도 자기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개량해서 농민의 피땀을 착취해가는 거대기업들의 파렴치함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의 악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이 지구촌입니다.
바울이 굳이 무리(pa'"만유, 만민, 전체)라는 단어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서 제외된 것이 사람이 됐든 자연이 됐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재앙은 결국 교회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다 당하게 돼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성도가 가져야 하는 사랑의 대상에서 만유와 만인을 제외시키고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미련과 부족과 허물을 몇 배로 부풀려져서 상대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가슴을 찢으면서 아파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품는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지 않고 훈련시키지 않으니까 교회와 성도가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합작해낸 재앙이라는 작품에 모든 피조물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미의 마음이 있는 곳에 아기가 있듯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가 있어야 하고 주님의 눈이 바라보는 곳에 우리의 눈길도 있어야 합니다. 병자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우리는 통회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함께 설 수 없습니다. 병든 사회, 우리에게 맡겨진 병든 이 땅의 회복 또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정녕 이 땅의 통치를 위임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이 땅의 아픔에 민감해야만 합니다. 어미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기가 아파서 우는지, 배가 고파서 우는지, 함께 놀아달라고 우는지 다 알아차립니다. 아기가 아프면 차라리 자신이 아프기를 바라는 것이 어미의 마음입니다. 도대체 아무 힘도 없는 아기가 어미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발가벗겨져 무엇 하나 감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미에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넘기는 아기의 절대의존적인 삶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는 어미가 책임져주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기는 어미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미의 모든 것이 아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기의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절대의존적인 신앙입니다. 바울이 지금 '복음을 위한 일에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했다는 것은 빌립보교회가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나가서 전하는 자와 안에서 돕는 자의 긴밀한 연합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죽여주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기도와 거기에 따르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우리에게 승리는 없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하나는 언제나 나를 죽여서 너를 살리는 하나입니다. 아기가 어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어미는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갖추고 사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는 나를 죽여 내 안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 은혜에 참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구속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 전파로 인하여 바울이 투옥되어 법정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을 때, 빌립보 교회는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복음전파라는 공동의 목표를 놓고 너무나 아름답게 협력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당함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 서로 돕고 "저희가 다" 한 마음으로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깨지고 있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바울은 "내가 너희(우리), 다, 함께"를 말함으로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할 때마다" "간구 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관심과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소속 교회에 대한 애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널려있는 게 교회라서 인지는 몰라도 조금만 비위에 안 맞으면 교회 옮기기를 옷 갈아입듯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사를 가도 목사에게 인사도 없이 가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이 자기가 큰 소리 칠 곳을 찾는 분이거나 아니면 큰소리치다가 상처를 받아서 아예 입을 꼭 다물고 예배 꾼으로 남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큰 교회로 나가서 무리 속에 숨어서 편하게 주변인으로 남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큰 교회들, 겉으로는 평온히 열심히 노를 저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들이 제각기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같은 방향이 없으니 표류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책임을 느끼거나 잘못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자도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가 겉모습만이 아니라, 손과 발이 그리스도의 심장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 시대의 병든 심령과 병든 이 땅을 치료할 유일한 처방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로만 풀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만이 이 시대의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입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을 버리고 자기 생각만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그들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강한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간의 지혜를 동원하는 곳에는 언제나 비판하고 헐뜯고 악한 영향을 끼쳐서, 서로를 파괴하고 찌르고 공격함으로 나와 이웃을 가름으로 장벽을 쌓기 마련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교회 전체를 위협하는 암적인 요소들입니다. 이 때 우레에게 필요한 것이 아기를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심장을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작동시킬 때만이 이 시대의 병을 치유할 수 있고 깨어진 교회도 하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연합을 경험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으로 인해서만 하나를 이룰 수 있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된 것은 이미 성삼위 하나님께서 창출해내신 일이며 그의 사역입니다(빌1:6). 따라서 이 연합은 살아있는 연합이요, 결코 깰 수 없는 연합입니다.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찢긴 것을 억지로 꿰매어 봉합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명력을 지닌 연합입니다. 그것은 겉으로의 연합이 아니라 속으로부터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합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된 것을 깨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오기에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성령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기 앞의 어미 같은 바보가 필요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주님을 의존해서만 일할 수 있는 바보가 필요합니다. 이제 똑똑했던 과거의 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보 같은 어미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욕된 과거에 잡혀서 영광된 미래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스로를 비하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다만 주께서 오늘 내가 서있는 이곳 이 땅을 온전히 책임질 자로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존해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역사의 조역이 아닌 주역으로 쓰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들로 함께 묶어 두셨습니다. 이 아름답고 숭고한 축복을 안다면 우리 한 번 죽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달고 살아봅시다. 바울이 교회를 생각하고 간구 할 때마다 그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했다면,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우리들인데 못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뜨거운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자들이 아니라 아기를 사랑했던 그 어미의 사랑으로 우리 서로를 사랑해봅시다. 우리 서로를 위해 살고, 서로를 위해 죽어 봅시다. 실패야 있겠지만 그래서 주님 앞에 면목도 없겠지만 그래도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다보면 반드시 성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한 번 두 번 도전하다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나도 놀라고 이웃도 놀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아름다운 소문들이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복 받은 일이 없고 이보다 확실한 전도도 없습니다. 물론 아니꼽고 치사한 일들이야 수없이 겪겠지만 나는 죽은 자로 알고 가다보면 그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지치고 곤한 나를 품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감격을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원하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 봅시다. 잘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원하는 길을 우리 다 함께 가야만 합니다. 우리 다 함께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위하여 달려야만 합니다. 이 시대의 미련하고 부족한 자들만이 아니라 더렵혀진 이 땅까지 품고 돌보고 감싸면서 함께 가야만 합니다.
버리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만의 몫입니다. 그것이 이 땅의 통치를 위임받은 역사의 주역으로서 우리만의 영광된 역할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랜 시공을 넘어서 놀라운 투자를 해서 그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들입니다. 신`구약에 등장한 그 수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도 따지고 보면 그 모두 우리를 위해 등장시킨 무대 위의 조역에 불과합니다. 그 모두 나를 위해 하나님이 연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접받고 있는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이 역사의 주역은 지구상의 위대한 자들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래서 그의 자녀가 된 여기 함께 있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의 목적에 바로 우리를 놓으셨습니다. 나 하나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 완성해 내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 놀라우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우리 모두(내가 너희), 다, 함께" 하나로 엮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역사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리고 풍요롭게 써나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모두를 통해 사도행전을 계속 써내려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우리, 모두 다, 함께" 할 일입니다. 이 특권을 놓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운 실패자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역사의 뒷전에 서있는 주변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대와 이 역사의 주역들입니다. 성도라 불리우는 역사의 주역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반드시 승리의 길 영광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고 순종하여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처럼 지극히 보배로운 영적 연합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심에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