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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강,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102(94), 505(452), 사도신경, 기도 518(463), 말씀, 주기도, 278(220).  


(빌 1:7-8)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초대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핍박이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가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돕는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하고 그와의 교제를 계속한 것은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의 복음사역을 도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지킴으로 바울과 함께 투옥과 재판에 참여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것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도운 일은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에게는 오히려 빌립보 교회를 핍박할 이유가 됐다는 것은 그 원수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재앙입니까?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그들에게 닥친 현실을 진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흔치 않은 충성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 편에 선 것 때문에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음을 변호할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신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실로 순교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복된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입니다. 핍박자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집권자들로부터 예수를 부인하라고 핍박을 당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순교를 각오해야하는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순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 거의 모두가 순교자의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바울은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는 말로 자신의 사랑의 강도를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있다'(e[cw)는 것은 바울의 마음을 붙잡아 보관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아니라 빌립보교회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목자 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돌보는 어미의 심정으로 돌본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 곁에 있어 주는 것 자체로 효도를 다 하는 것입니다. 아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부모의 기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기의 숨소리, 얼굴색, 오줌똥의 색깔, 손발의 움직임, 아기에 관한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을 그야말로 도둑질해가는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자랑할 것이 없으면 아기의 똥까지 자랑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오줌똥으로까지도 어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아기입니다. 아기의 웃음 한 방이면 하루의 모든 수고와 시름까지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부모에게는 아기를 위한 모든 수고까지도 감사요 기쁨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 수고를 못하게 되면 병이 나는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수고가 얼마나 고달픈 것인가는 부모된 분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식모살이를 할지언정 남의 집 아기는 보지 않겠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만큼 힘든 것이 아기를 돌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수고조차도 부모에게는 감사요 기쁨입니다. 오히려 아기가 곁에 없으면 불안해하고 병이 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지금 이 무리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그런 것이라고 '있다'(e[cw)라는 단어 하나가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입니다. 여기서 '매임, 변명함, 확정함'은 모두 법률적 용어로 사도 바울은 실제로 복음으로 인해 투옥되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헌금을 조금 모아서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의 돌보미로 보낸 것이 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 것 같은데 바울이 오히려 과민반응을 한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은 것이 그 행위가 은혜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cavri")에 참여(sugkoinwnov")했다는 것은 빌립보교회의 호의는 적은 것이었지만 그것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바울의 복음사역에 바울과 함께 공동으로 참여한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어서, 바울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담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물질이나 수고로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복음을 위한 작은 수고조차도 크게 받으신다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옥에서 심히 지쳐 있으면서도 집에 두고 온 어린 자식에게 젖을 먹이지 못해 애타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부모가 다 자란 자녀를 통해 효도를 받으면서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제를 유지함에 있어 형제와 친구로, 또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육체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모든 일에 가능한대로 서로를 돕고 아끼고자 하는 마음들로 계속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온 몸의 지체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기관들이 긴밀히 돕듯이 그렇게 서로를 돕고 아꼈습니다. 아낄 조건을 갖추어서 아낀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는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중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아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고 서로의 마음 가까이 서로를 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많이 생각했고 많이 염려했습니다.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묶여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대해왔습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우리 또한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몽땅 가져가 버림으로 서로를 소유하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애정을 쏟는 의롭고 거룩한 자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일들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쓰임 받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인 것입니다.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바울 안에서 성령이 역사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깊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지는 마음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전된 그리스도의 분신이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만 역사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도 기쁨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의 불행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복을 위해 수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일하는 모든 것을 다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묶여있고 또한 성령이 도우심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육신이나 자기 이익을 따라 사랑한다면 환경과 조건이 달라질 때마다 그 마음은 수시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철저히 자기의 뜻을 포기함으로써 철저히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드림으로 참사랑이 가능한 자들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을 죽여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만 일하시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죽은 자에게서 가장 강한 힘이 나온다는 것은 신비한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바울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원리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당신 안에서 당신을 죽이고 성령을 좇아서 그리스도로만 일하시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것은 평생 치러내야 하는 질긴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 승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려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빌립보교회를 그의 심장에 간직하고 있음으로 그들을 사모했습니다. 강한 애정과 선한 뜻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셨고, 고귀한 영혼들에게 나타내보이셨던 그 관심과 그 사랑으로 그들을 사모했습니다. 보기를 열망했고 소식 듣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가 그들 가운데서 보고들은 복음을 위한 수고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있는 또 다른 선한 일들에 대한 보다 많은 소식을 듣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는 그들 가운데 빈부귀천 유`무식에 관계없이 만유와 만인을 사랑했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무슨 일에나 그리스도의 추종자였습니다. 그의 모든 가슴 저미는 사랑의 근거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가슴 저미는 사랑, 이 뭉클한 사랑의 소유자들이 다 되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온도를 높여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머무는 모든 곳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사랑했던 그 영혼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무시하거나 괄시해도 될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유까지도 우리의 통치의 대상입니다. 그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가치와 능력은 소유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나 번영이 행복을 가져왔습니까?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어서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심장 예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이 사회가 이렇게 갈기갈기 찢기고 자살이 줄을 잇고 심지어 부모형제끼리도 고소하며, 소송하는 것이 가난해서입니까? 부모와 자식이 살인극을 연출하고, 토막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이 지식이나 교양이 없거나 미개인이기 때문입니까? 예수의 심장 예수의 사랑과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물질이나 권세 명예가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불행에서 건져주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돼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남의 옆구리의 종기가 내 손톱 밑의 가시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기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수난과 모욕을 당하시고도 어떤 변명도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의 발을 씻겨주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모른다며 도망갈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저들을 사랑하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가 아닌 죄인 우리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억지로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자원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가장 높으신 우주의 왕이시면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만유와 만인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2003년 10월 19일 저녁 6시 40분에 있었던 일입니다. 고정원 씨가 퇴근해 자기 집 벨을 눌렀는데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사랑하는 아내가 거실에서 흉기에 난도질당해 비참하게 죽어있었습니다. 2층에 올라가보니 사대독자 외아들 역시 참혹하게 죽어있었습니다. 화장실에는 어머니까지 처참하게 죽어있었습니다. 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원수를 갚겠다, 잡아서 더 비참하게 보복해야겠다.'는 생각이 고정원씨의 머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 이후 어떻게든 잡아서 잔인하게 죽여야 하겠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피로 범벅이 돼보였습니다. 그렇게 날뛰면서 엄청난 고통과 슬픔 저주 아래 몸부림치던 어느 날, 한 교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하루하루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중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이 사람의 마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마음에 가득 찬 분노와 증오와 저주가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태산보다 무거운 증오와 저주들이 모두 안개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넘쳤습니다. 본인도 믿을 수 없이 놀랍게 바뀌는 자신을 보고 자신도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변화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그에게서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는 자 누구에게나 주시는 똑같은 은혜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아 세례를 받고 보름 만에 그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 범인이 바로 우리나라 역사 최대의 살인마 유영철이었습니다. 그가 죽인 사람이 무려 23명이었습니다. 모두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정원씨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증오와 저주 대신 유영철이 불쌍해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살인마 유영철에게 두 남매가 있는데, 그 두 남매를 자기 손자로 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엄청난 증오와 저주로 똘똘 뭉쳤던 이 사람이 거기서 탈출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넘치는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수 있을까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권찰, 세례교인, 그리고 세례 받지 않은 새 신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옆자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한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에게 실망만 주는 남편이라도 겸손히 섬기고, 나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아내라도 아끼고 위하고 사랑하고, 나 보기에 못난 사람일지라도 겸손히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섬겨야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기독교는 이론도 아니고 말도 아닌 행동이요 순종이요 삶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 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 받은 자들로서 묵묵히 말없이 몸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와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말로 하지 말고 몸으로 겸손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것이 성도의 능력이요 힘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며,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하며,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며, 여러분들의 의식과 생각을 온통 그리스도의 것으로 메우시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주일에 행하는 어떤 행사에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의 심장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그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교회에서 하는 일 말고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보셨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순교할 각오가 있습니까? 오히려 길에서나 열차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부끄럽습니다. 분명히 주일 낮 예배는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나와서는 술지검지 먹은 닭 모양으로 꾸벅꾸벅 졸기가 일수입니다. 어떤 이는 설교시간에나 와서는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칩니다. 안 나오면 켕기는 구석이 있으니까 예배는 봐주는 수준이고, 얻어터질 것 같으니까 십일조도 꼬박꼬박 잘 냅니다. 특별히 눈에 띠는 잘못을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문제만 나오면 빵점입니다. 시빗거리만 생겼다 하면 약방의 감초 모양으로 끼고, 큰 소리는 제일 먼저 치고, 사랑하고 용서할 핑계 아니라 미워하고 도망칠 핑계를 찾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집에서는 어떻습니까? 부부끼리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고쳐야할 것이 서로에 대한 말씨부터 고쳐야합니다. 말에 공경이 담겨있지 않으면 행동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하고 무시하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하고 사랑이 담긴 말을 사용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상과 벌이 분명해야 합니다. 

배는 물위에 떠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배 안을 물로 채우면 배 안의 사람이 죽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내 속을 채우면 내가 죽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아도 우리는 그들과 구변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야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들의 육체도 건강하게 지켜줄 책임이 있는 부모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 아무리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상대의 영혼을 위하여 사랑하고 용서하는 부모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과연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좋아하실지 싫어하실지,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치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죄,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죄, 예수를 믿으면서도 더러운 옛 성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죄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미워서 냉소하고 비웃고 조롱하던 원수 같던 박 집사를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잡아먹겠다고 물고 늘어지는 김 장로를 위해 함께 울어 주고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실패했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다시 시작하다 보면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작하면 선한 일은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터서 묘목이 되고 그 묘목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선한 마음도 처음에는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일단 싹을 틔우기만 하면 자라서 크게 되어있습니다. 그 선한 마음이 내 손과 발을 움직이고 그것이 내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어 자라면서, 내 생활과 삶으로 드러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약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나를 실망시키고 절망케 하고 괴롭게 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얻기 위해 내가 그 악당을 위해 수고할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악당을 참아주고 기다려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거함으로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시기에 가능합니다. 신자의 삶은 그래서 복된 것입니다. 백합꽃은 찔릴수록 그 향기를 더 발하듯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성도는 위기에 처할수록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할수록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리 살았다면 우리 또한 그리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스스로에게 정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저는 빌립보서를 묵상하면 할수록 너무나 초라해지는 제 모습을 확인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저의 외모는 날마다 낡아가고 쭈그러지고는 있지만 마음은 주님을 품어 날마다 새로워지기가 소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쓰신 하나님이 또한 날 아주 작은 부분에라도 쓰시기 위해 이곳으로 부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성히 풍겨나는 남은 생애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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