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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강 빌립보 강해를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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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강, 빌립보 강해를 시작하면서.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제가 얼마 전 음성 정신병원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병동마다 초만원이었습니다. 매우 큰 규모였는데도 그 옆에 대형 건물을 또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거기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의 다툼, 국민의 아픔을 외면한 끝 모르는 여야의 정쟁,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비리사건들, 그리고 국가의 양심이라 할 법조계의 판검사와 정치 언론인까지 뒤엉킨 변호사 비리 사건 등등을 지켜보면서, 저는 그 병원의 창살은 오히려 병동 밖의 사람들로부터 병동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병동 안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병동 밖에는 온통 이기주의로 더럽혀진 추한 인간 군상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사분오열 갈라지고 뻐개지는 아귀다툼뿐입니다.
교회는 이제 그 교파수를 헤아리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가 돼 버렸습니다. 성도들조차도 자신들이 왜 이 땅에 있어야 하는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고 사는지 오랩니다. 도덕불감증인지 양심불감증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의 노예라는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정말 중병에 걸려있는 것은 병동 안 사람들이기보다 오히려 병동 밖의 인간들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 빌립보서를 강해를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내 주변과 이 사회는 왜 이리도 삭막한 것입니까? 모 반기련 회장은 자신들이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유를 구약성경의 허구성,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거대한 기업으로서의 교회 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의 주장 중 처음 둘은 기독교에 대한 무지 때문으로 돌려 버릴 수 있지만 세 번째의 것은 우리가 결코 무시해버리고 넘길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업으로서의 교회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교회의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 질병의 내용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부도덕성, 담임목사의 세습, 교회로 인한 불신자들이 입는 상처들, 세상과 교권의 밀착 등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습니다.
2005년 통계로 우리나라 총인구 4700만 명 중 신교가 860만 명, 구교가 51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는 것은 기독교가 이렇게 양적인 팽창을 이루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요 모양 요 꼴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바로 믿고 있지 못한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분일뿐 내 삶과는 무관한, 때로는 급할 때 불러보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자신을 통찰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나의 삶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나는 과연 그분에게 붙들린 인생을 살고 있는가? 오늘 그분의 뜻이 나의 어디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내 인생을 그분에게 맡기고 있는가? 오늘도 내 생각 내 뜻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가 아니라 내 인생이 얼마나 그분에게 지배당하면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지배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든 이 빌립보서 강해가 끝날 즈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히 지배당하는 삶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서부의 주요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빌립 2세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가 빌립보를 개수하고 미화했으며, 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빌립보는 주변에 역사적인 유적지가 많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는 주로 이방인 신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바울은 서기 52년경에 2차 선교여행 때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첫 교회였지만(행16:33), 바울은 그 지방에서의 강한 반발로 인해 잠시 머문 후에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가보지 못했지만, 3차 선교여행 중에(57년경) 다시 들렸고(행20:4), 그 5년 뒤 기원 후 62년에 로마에서 구속되었을 때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지로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답답해하던 중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행16:9). 마게도냐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 환상이 밤에 바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바울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기를 허락하셨지만 결코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시작은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최초로 교인이 탄생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고쳐준 것 때문에 주인에게 잡혀서 매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모진 핍박과 고통도 당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고초를 당했고, 매질을 당했고 착고에 채였습니다(행16: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활활 더 타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대부분 교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어떤 악한 환경도 바울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인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빌립보교회 성장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이 일 말고는 별다른 열매는 없어보였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시작은 참으로 미약했지만, 나중은 크게 흥왕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점점 번영했고, 하나님의 종들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바울이 다른 교회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을 때에도(4:15), 그들로부터는 세상적인 것들을 거두고 영적인 것들로 갚았습니다(4:18).
그는 예수님 때문에 모진 고난을 겪었으나 모순되게도 그 안에서 그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더 거룩해져 갔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 안에 그리스도의 심장을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심장으로 교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만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심장을 가진 자만이 이웃에 대해 참 사랑의 눈을 뜨고 어두운 이 시대의 빛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깊은 사랑은 자기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분에 넘치는 사랑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앎으로써 영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영혼들 섬기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성도는 상대가 자신을 어찌 대하든 성도다운 사랑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가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대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을 위해 뇌물, 권력 등 온갖 수단방법 다 동원하더라도 성도만은 성도다운 삶, 심지어 망하는 것으로도 성도다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성도의 심판이고, 도전이고 유일한 대책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은 없다."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상은 한마디로 음녀입니다. 양심의 흔적은 간데없이 악을 즐기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악에 대하여는 불감증 환자들이 다 돼버렸습니다. 영적 문둥병에 걸려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갈등이나 고뇌조차 없습니다. 현대인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노아가 살던 그 암흑의 시대나 사사기의 이스라엘 상황과도 흡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더욱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그들이 듣던 안 듣던 외쳐야 하고 빛들로 나타내야만 합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안 돌아왔지만 계속 방주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향한 성도의 공격이요, 방어입니다. 그 공격과 방어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가장 강력한 공격과 방어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복 받은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부서지고 깨져서 불안에 떨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성도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빌 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이 시대를 향한 어쩌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침몰해 가는 배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이 시대 마지막 구조선입니다. 더욱이 이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박해로 인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는 죄수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 시급함과 절박함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색이나 이론의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해 실제로 얻었던 산지식을 그의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필치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 성숙해갈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빛으로 당당히 설만큼의 진전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다고 기대해도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보좌로부터 흐르는 이 생명수를 내게서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할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빌립보서의 보석과 같은 말씀의 비밀들을 찾아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함께 이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고 또 치유받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성도들만이 이 시대를 밝힐 생명의 불씨를 품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바울은 이 능력 때문에 사도로서, 성도로서, 선교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때로는 교리의 말씀으로 안위를 주는가 하면(3:9), 때로는 부활의 소망을 일깨움으로 용기를 주기도합니다.(3:20-21) 또한 성도의 삶의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2:5-11) 그것을 이루는 능력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자를 잡아 이끄시는 하나님의 다정하신 손길임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손을 잡고 나아가는 자에게 참 평강과 승리의 기쁨을 언제나 풍성하게 채우실 줄로 믿습니다. 그 능력을 힘입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와 이웃의 문제를 보고, 그의 마음으로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 나와 이 시대의 질병은 치료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우리의 마음에 채움으로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권력과 명예와 물질을 얻고, 잘 된다 해도 그것은 참 기쁨도 평안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내 신앙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지고 성령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는 것만이 진정한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와 기쁨의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의 열매를 맺어드리는 것이 이 시대 저와 여러분 평생의 기쁨이요, 면류관이기를 소원합니다.
이걸 못하면 이 시대를 구원할 방도가 없습니다. 최첨단의 문명과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지만 심령은 죽어 있습니다. 이 땅 인구의 1/4 이상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로 몰려들고는 있는데 왜 세상은 어둡기만 한 것일까요? 그것은 불신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빛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교회는 학개시대의 교회와도 흡사합니다. 학개시대의 백성들은 학개의 예언에 감화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재건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열조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무관한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한 편으로는 성전봉사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재건을 위한 봉사를 죄의 낙을 누리는 삶에 대한 면죄부로 삼았습니다. 오늘 날 대형 예배당을 짓고, 주일 낮 예배나 참석하고 그것 하나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책임에 대한 면죄부로 삼고 있는 현대교회의 모습과 너무 닮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말씀 특히 바울의 서신들은 불신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병든 교회의 치유를 위해 기록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심이나 수고의 양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향기 곧 내면으로부터의 항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 속에 뿌리내린 불순종은 오히려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탈을 쓰고 더 패역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악한 본성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입니다. 이 시대의 소망은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안타까우신 사랑의 깊이를 헤아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순종과 항복을 드려야만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풀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문제는 먼저 믿는 우리 자신입니다. 만약 제가 투자론을 강의하는데 제가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면 누가 제 강의를 믿겠습니까? 부동산 투자로 남을 부자 만드는 강의를 하고 다니는 분이 남의 집에 전세 들어 산다고 하면 그의 강의가 얼마나 우스운 것이 됩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시대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웃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궁금증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모순된 현실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악하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두움에 처해있는 자들을 빛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선 우상의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사주, 관상, 토정비결, 때를 따라 드리는 제사들을 없애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추방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은 나쁜 버릇도 마찬가지입니다. 틈을 보이면 안 됩니다. 사탄은 한번 틈을 주면 쫓아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성도들이 너무 쉽게 살려하고 있습니다. 쉽게 살뿐 아니라 악에 너무 쉽게 적응합니다. 뇌물 쓰고, 아부하고, 타협하고, 세상 사람들이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덤빌 지경입니다. 술좌석에 가면 동이 술 마시고, 조상신 마당신 짚신까지 다 섬기고, 사장 앞에선 사장 편, 근로자 앞에선 근로자 편...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무당굿하고 우상 섬기는 드라마 아무리 재미있어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전파매체를 타고 귀신이 안방 깊이까지 파고들고 있습니다. 방송사에 항의 전화할 용기가 없으면 채널을 꺼야합니다. 집안에 음란한 책, 비디오, 테이프, 음반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불태워야 합니다.
그런 것은 비싼 거라도 팔아먹는 것도 죄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을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자기 주변에서는 사탄이 보금자리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옛 구습이 파고들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에게서 쉽게 살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세 확장을 위해 교회의 문턱을 없애버렸습니다. 권징을 하는 교회는 아ㅖ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별의 별짓을 다 합니다. 더러운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죄를 치유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눈물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죄 때문에 고민을 할까봐 쩔쩔매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뭐 죄 같은 것 갖고 고민합니까? 맘 놓고 죄짓고 회개하세요." 죄를 부추깁니다. 죄와 싸우지 않습니다. 설교강단에서 죄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지 오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부자 되고 명예를 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해내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가정의 일, 회사의 일이 다 신앙생활의 연장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필요하다면 눈이 뽑히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더라도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세상이 다 썩어문드러져도 교회만은 그 존재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순의 뿌리를 뽑으라고 우리를 이 모순된 세상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성도가 이 썩어진 땅에 살아야 된다는 것 자체가 긴장이고 모순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썩을 대로 썩은 이 세상에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이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출 책임을 우리에게 지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신자들에게 살아있는 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책임을 진 자들입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고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빚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이 모자라서 우릴 일군으로 부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질이나 노동력이 필요해서 우릴 노예로 부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적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사건과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키워내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만이 그의 목표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이나 업적이 아니라 나의 성도 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빛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전도나 봉사 선교 그런 것들조차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지혜나 물질을 동원하고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양식을 삼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로 채우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으로만 채워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가 열망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고 망하고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섬기는 삶, 선을 악으로 갚아오는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군중들 속에서조차 고독의 질병에 시달리는 그들을 섬기며 위로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성도의 길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 하나님,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못한 자신에게 애통할 마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미워한 자를 내일은 사랑하고 용서할 힘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의 기도에 목말라하고 계십니다. 성도의 생활방식은 나와 당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빌레몬 설교를 마칠 즈음에는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가정이 변하고 교회와 여러분이 속한 모든 곳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로 풍성히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