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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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강,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190, 387, 401, 360, 456,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 말씀은 지난 19강과 20강의 연장입니다. 우리 번역 성경은 지극히 선한 것이라 되어있지만 원어에는 (diafevrw)라는 단어 하나뿐입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 의역을 하다 보니 '지극히'라는 말을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이 '지극히 선한 것' (diafevrw)은 (dia~을 통하여, ~동안, ~와 함께, 때문에)와 (fevrw다스리다, (고통을)참고 견디다, ~앞으로 가져가다, (불평불만을) 발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 의미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단순히 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나를 화나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약 올리는 원수의 도전이 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 상대로 인해서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불평불만들을 참고 견디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통을 다스리고 이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동원해서 우리를 이리저리로 몰아 부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에 걸려들면 아무리 우리가 성도라도 밤을 설치며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도전해오는 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세운 존재들인 것을 세상과는 다른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뛰어난 존재들임과 세상을 능가하는 존재들인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그 내용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선한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놓치고 말씀을 보게 되면 서울로 가야할 사람이 부산으로 가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단어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도 그런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저의 몸부림입니다. 사탄의 올무로부터 나와 주변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한 영혼을 구해내는 싸움은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올무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고 특히 목사가 가야하는 좁은 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진리의 길을 순탄하게 가도록 내버려둘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니까 사탄은 처음부터 포기할 것이라는 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사탄으로서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려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기를 치고 덤비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도전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을 이길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창조자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시며 우주의 심판자이라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 9:5,9)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탄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도록 도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 분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에게는 자심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그들의 왕국이 멸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날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은 그분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를 지키시며 돌보십니다. 그분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라도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악한 자들이 형통치 못하게 하시며, 그가 의롭다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의뢰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우리의 위로요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깨우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패잔병이 아니라 위대한 승리자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 앞에 철없고 무지한 아이일지라도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줌으로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또 나를 위한 이웃들의 기도가 있을 때 우리는 기도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9-10절 상반 절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의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사 각자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셔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의 풍성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죽을 죄를 사하셔서 죽음에서 건져낸 것이 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 하나님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그 비밀스러운 것들을 넘치도록 더 많이 가져다주기를 계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아는 지식과 총명에까지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풍성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예정하신 그의 위대한 구속계획과 구원체계인 그 놀라운 비밀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행하셨고 성령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그 복음 곧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이 우리의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 차고 넘쳐서 우리가 하늘의 비밀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해하고 통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과 총명입니다. 이것은 위에 있는 사랑의 지식적 증가의 결과입니다. 헬라어 '선한 것(diafevrw)'은 본래 '다르다', '뛰어나다'는 의미로 '중요한 것' '뛰어난 것' '최선의 것'을 가리키나 그 상세한 의미는 전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또한, '분별하며(dokimavzw)'은 '시험하다', '시험하여 증명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지극히 중요한 것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일과 사건 속에서 우리의 생명에 관한 하나님의 일과 그 안에서 역사는 사탄의 역사를 시험하여 증명해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박애주의자들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누구나가 다 인정할만한 어떤 일들을 해냈을 때 거기서 사탄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가르치는 일들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나 천주교 목사나 신부들 중에 그런 분들이 적지 않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우리에게 실제적인 문제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현실 속에의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서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일과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건과 일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은 물론 선한 일들 속에까지 파고드는 것이 사탄의 능력입니다. 혹 '나는 어제도 아무런 도전을 받은 일이 없었는데!'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열에 하나는 신앙이 아주 좋은 분이고 열에 아홉은 늘 타협하고 살기 때문에 영적 감각이 아주 무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 됐다. 나는 열에 하나에는 들었겠지?' 생각하시는 분들은 미안하지만 100% 사탄의 올무에 걸려있는 분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미묘한 것들 사이에서 지식과 총명이 더해진 사랑을 통해 올바르고 온전한 것을 분별해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수없이 사탄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에 의지한 지식과 총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와 자녀들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제가 이 설교문을 다시 정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 아이들과 제 아들 선교사 내외들을 통해 훈련받을 또 다른 선교사들까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에 비해 훌륭한 분들의 지도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부모된 자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인가 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될 때만이 지극히 선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타나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남의 유익은 물론 자기 자신의 유익조차 구할 수 없는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지식과 총명으로 풍선한 사랑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건과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선을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은 단순한 선악의 분별이 아니라 너무나 탁월해서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려도 후회가 없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의 모든 문제들에서 성도의 구원의 제반문제를 살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제 설교문을 처음부터 세세히 광산에서 보물을 찾아 케어 내듯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람의 이지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믿음과 기독교 신앙을 모두 거부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너무 많아서 참으로 불안합니다. 학자들이나 교수들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설교문을 제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소위 신신학자라는 분들의 주장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합리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많은 불신자들이 현혹되는 것은 물론 성도들이라는 분들도 이 올무에 수없이 걸려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만이 다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실지로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비추어 보면 분명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달랐습니다. 사실은 다 틀렸으면서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옳아 보였습니다. 사탄은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는 교묘한 기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일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감겼고 귀는 막혔으며 감각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한 것을 안다는 것은 죽은 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대한 구원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는가, 곧 어떻게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의 비밀한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을까요? 누구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만 하면 성경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까요? 바로 그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답이 '지식과 총명'입니다.
그것은 학문과 재물과 명예를 다 틀어진 니고데모라도 알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학문을 다 동원한다 해도 보여지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그 무엇으로도 알 수 없는 진리입니다. 철학자들은 누구나 지식과 총명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려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정답을 찾아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라 깨우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식과 총명으로는 미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드리는 성도들에게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파악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과 총명'은 성령을 근거로 한 지식과 총명인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도록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이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성경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라 말합니다. 성령은 죄인을 설복시켜 깨닫게 하며 자기 죄를 자복하도록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인류의 가장 큰 불행은 가난이나 질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복에도 깨닫지 못하고 말씀에 불복종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그들은 죄의 구덩이에서 헤엄치면서도 죄를 범하고 있다고 느끼지도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거역하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우리 역시 그랬었습니다. 마당 신 부엌 신 똥간 신 짚신까지 온통 귀신으로 둘러친 집에 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우상숭배 죄라는 것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미풍양속으로 포장해서 자랑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똥물에 밥 말아먹듯 온갖 죄를 다 범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계급장처럼 달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우롱합니다. 오직 자기만의 왕국건설이 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깨어짐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통회자복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열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령이 죄에 대해 책망하심으로 받은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성도의 참 지식이고 이 지식을 삶으로 옮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너를 죽여 나를 살리는 세상인데 오히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는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또 그 지식을 실행할 지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전해 오는 너무나 강한 사탄의 세력 앞에 응전할 능력도 용기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하신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사탄의 실재를 알아야 하고, 빛을 알려면 어두움을 알아야 하며, 진리를 알려면 비 진리를 알아야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사탄의 역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힘이 되시는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상주하고 계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은 지식과 총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사(10절)"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지식의 풍성함의 결과입니다. 사랑이 지식적으로 자라가면 지극히 선한 것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식과 총명"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거기서 역사하고 있는 사탄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구별할 수 없게 됨으로 결국 사탄에게 농락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사탄이 도전 속에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헤아릴 수조차 없는 도전 앞에서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도 없고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방법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자에게 나를 의지하는 방법 말고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힘이 돼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돼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탄은 우리를 사망과 절망으로 이끌기 위해 환경과 사건들을 동원하고 있는데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만 하면 그 악한 환경과 사건들이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함은 물론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환경과 조건에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동원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도전해 오는 그 사람들을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바로 그 대응방식에 우리의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데 그분은 의롭지 못한 우리가 도와달라고 해서 무조건 도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운 방법으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내 힘으로 삼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신 십자가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SOS를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우리가 택할 유일한 응전방식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의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나의 능력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만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기도조차 악당들을 청소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당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용서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악당을 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건과 일들로 인한 시련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선한 믿음의 행위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자기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결코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만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억울하게 하고 약 올리는 악당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능력으로 삼는 삶입니다. 이것을 안 하고 자기의 실력으로 자기 능력으로 삼는 자들은 어둠을 찾아 숨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인간의 양심은 남의 눈을 속이면서도 두려움을 모릅니다. 불의와 타협하고 죄의 종노릇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자신은 물론 하나님까지 속이려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거나 살해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유괴하고 제자가 스승을 폭행합니다. 남의 것을 훔칩니다.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고 사람을 죽입니다. 거룩을 포기한 인생은 부패한 죄성과 타락한 정욕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끝은 무서운 심판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시대를 밝힐 책임이 있습니다(빌2:15). 이를 위해 우리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을 올바로 분별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는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진실'을 말해야하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거짓'에 노출되었거나 그럴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긴장을 풀 수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거짓됩니다. 특히 생명에 관한 지식에 관해 더 거짓됩니다. 세상은 죄로 말미암은 어두움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심판 날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그 날이 있음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치 못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의도는 그분의 심판조차도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악한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우리를 결코 손해되는 것으로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소망 중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기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그 시련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보다 빨리 도달시키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홍수와 같은 큰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정화시켜서 새로운 은혜를 더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시련조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는 것은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선한 지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지식 이상의 좋은 보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이 여러분들의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밝히 깨달음으로 바른 성도의 길을 걸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