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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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강, 성도의 감사와 확신.
13, 344, 352, 359.
(빌 1:3-6)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고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 밖으로 추방되어 꿈도 미래도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중 단 한 명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수 있냐구요? 그러나 똥간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다른 것이 인간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놓고도 이럴진대 미래에 약속된 것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 열 명 중 아홉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없고 불평과 원망만 가득하여 마음은 온통 세상 것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를 밝게 해주고 미래를 아름답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3절의 원문은 '감사한다. 나는(eujcaristevw)'을 맨 앞에 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감사'라는 말은 '좋다'는 의미의 '유'와 '은혜, 좋은 선물'라는 의미의 '카리스테오'의 합성어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라는 말이 '좋다'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의 합성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좋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우리가 '좋다'는 말에서 가장 먼저 연상시킬 사건이 천지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나하나 이루어 가시면서 하루의 창조를 마치시고 자신의 창조를 바라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은혜'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결국 감사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누리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육이 죽음의 상태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을 체험함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격이 차고 넘치게 되어 그 감격의 물줄기는 폭포수가 되어 감사와 감격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했을 때 이 사실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이러한 감격과 감사를 되살리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이 지은 아름다운 세계와 사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너무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기도 대상의 연약과 부족을 채워달라고 외치는 기도는 그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 영혼을 지켜내기 위해 나를 철저히 죽이는 섬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간구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런 간구야 말로 창조성을 가지게 됨으로 자신과 교회의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엄청난 도전 앞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이러한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성도들만의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너를 연단하시고 너를 통해 나를 연단하십니다. 바울은 앞에서 말한 감사의 직접적인 이유를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절)."고 말합니다. 바울의 간구가 창조성을 가지고 응답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가 복음에 참여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개척 초기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교제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어제 행한 선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일 행할 선을 위해 준비하며 교제를 지속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세계를 내다보면서 서로의 부족을 채우기 위한 교제였습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서로 나누는 교제! 교회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받기 위해 나를 죽여 너를 세우기 위한 섬기는 교제! 이런 교제라면 위대한 창조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를 돕고 잡아주고 세워주면서 서로의 역할을 보완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우리도 서로 돕고 연락하고 연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롬 12:4-5).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세상 속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과거에 강도, 살인자, 음행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도의 무리(1:4)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장 미련하고 천해 보이는 자라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시골 할머니와도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복음 안에서 차별이 없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지식, 인종, 남녀, 학력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들과 부딪치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 교제(참여)의 과정에서 속상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을 수없이 겪고 이겨내야 하는 싸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 훈령을 위해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오는 악당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악당들 때문에 너무 억울하다고 항의하고도 싶겠지만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그를 담당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섬기라고 당신 곁에 두신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자동으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의 본성은 억울함과 분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를 지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섬김입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려는 섬김이 없다면 교회는 평화를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악한 것만큼 그것은 그가 나의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화를 내고 분을 폭발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섬김으로 그 악당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참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오래 참으셨을 뿐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이 섬겨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어서 탕자는 비로소 새사람으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작은 마을에도 우리의 교제에 목말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기에는 사랑을 주고받는 자가 아니라 무조건 나눌 자만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를 향해 악악대는 사람은 나눌 사랑이 고갈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100만큼 사랑을 베풀었으면 너는 적어도 1만큼이라도 사랑을 주어야 당연하다고 따지는 것은 무자비함을 수 있습니다. 따지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믿지는 장산 줄 빤히 알면서도 무조건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죄악 된 세상에서 도무지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악한 환경 속에 찌들고 길들여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끝없는 사랑으로 섬기려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나에게 악악대는 그 악당들과 거룩한 교제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육간에 나눔이 풍성해야합니다(행2:44-4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듯 서로의 필요를 채울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지체를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서로의 형제애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성도의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러한 감사는 '확신(peivqw)'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번역과는 달리 6절 역시 3절과 같은 형식으로 '확신한다. 나는'을 맨 앞에 놓고 강조로 시작합니다. 또한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미 응답된 일들이 지속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감사함' 역시 그 응답에 대한 감사였음을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왜 이런 것들을 목회 현장에서는 보지 못했을까? 그나마 지금이라도 깨닫고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더 놀라는 것은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들이었습니다. 그 의미들을 살려 번역해보니 '확신한다, 나는 왜냐하면 내가 성령의 동의하심에 의존하여 기도를 드렸음으로, 너희의 분쟁은 이미 참과 거짓이 드러나 이미 화해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런 유추를 할 때마다 본문의 흐름이나 성경 전체의 내용에 맞추어 가면서 제 가슴은 설레고 머리는 오히려 차분해짐을 느낍니다.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놓칠까 보아 초긴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이 확신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은 바울이 투옥된 것 때문에 오히려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빌 1:14). 이 확신은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빌 1:6). 바울은 큰 확신을 가지고 타인들이 받을 영광된 기업에 관해 말하면서 그들이 심판 날에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심판 날에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확신이 있습니까? 쉽게 말해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죽어봐야 알겠습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만약 '예'라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자기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보면 우리는 100% 지옥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에게 있는 자들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고, 성령하나님이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확신과 넘치는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 믿으시는 줄 압니다. 이제 천국에 갈 확신 곧 영생의 확신이 있습니까? 혹 여러분 자신이 개차반이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못난 자신을 보시면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 영생 곧 천국은 이미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의 뜻이나 능력이나 실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근거를 두고 가르치는 그 어떤 종교에도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에는 이미 주어진 구원과 우리가 완성해가야 하는 성화적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천국백성이라는 사실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겨두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성화의 문제도 끝내는 은혜로 완성되어지겠지만 그것이 느리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느낌에 따라서 하루에도 수없이 시계추처럼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의 구원문제는 잘 믿고 못 믿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느냐 아니냐 곧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살았으면 산 것이고, 죽었으면 죽은 것입니다. 다만 살았어도 건강한가? 병약한가? 곧 성숙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마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축복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며 또한 교회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이루실" 하나님의 보증하심으로 인해 "처음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로 성도가 끝내는 거룩을 이루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감사를 앞당겨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나의 잘남과 못남에 따라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자신의 연약함이나 흔들림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양자 된 아빠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함을 그대로 물려받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후사로 삼으셔서 그리스도가 누리는 모든 영광을 우리도 동일하게 누리도록 보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증하신 분이 성령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악한 환경이나 나 자신의 미련 때문에 지옥에 갈까보아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일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됨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하나님의 영으로 강제로 끌어서 하나님의 아들 자리로 운반되어진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전하심을 전심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것을 이행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 이행하여 주실 분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 순간도 의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라도 때때로 의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무디에게 와서 자신은 25 년 전 구원받은 이래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럽군요." 대답했습니다. 무디의 말은 마치 그가 "목사님, 제가 결혼한 지 25 년이 되었는데 배우자와 한 번도 말다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정말로 결혼했는지 의심스럽다." 했습니다. 배우자와 말다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안에 의심을 제거하고 신실한 성도로서 자라가기까지는 많은 의심의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성숙해 갈 수 있음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화를 이루는 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삶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23:6)" 노래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기도 했고, 원수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마침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을 한 경험을 수없이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미 누려온 과거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나를 따르리니'는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를 쫓아온다.'입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줄곧 나를 좇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그 축복에서 도망치면 어찌 될 까요? 갈비를 부러뜨리든 다리를 부러뜨리든 다시 그 축복을 받을 자리로 끌려가도록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복 받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의 인자하심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내게 반한 스토커처럼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항복할 때까지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옹고집을 아셔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조차도 감사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들을 헤아려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는 정말 피하고 싶고 원망스러웠던 그 수많은 일들이 지금 돌아보니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베풀어질 축복들까지 감사함으로 감격과 기쁨을 새롭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된 우리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의 자녀 된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유익하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시고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끊임없이 불성실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빠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신실함으로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필요하시다면 온 우주라도 동원하셔서 우리를 그가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께 불성실할 때라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고통이나 시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를 기어코 고쳐내시는 감사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만사형통의 길을 약속한 일이 없으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하신 그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여전히 그분의 함께 하심, 그분의 인도를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인자하심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좇아 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동일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앞으로도 우리를 인도해 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누시면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한 평생을 마무리할 그 때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 속에서 당신의 인생에 간섭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는 것을 확신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눈동자 같이 돌보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고, 이런 은혜를 내 공로가 없이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감사입니까! 하나님은 첫날부터 시작하여 심판 날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 가운데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솔직하다면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가능한 싸움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에 이끌리는 인생이기에 승리는 이미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감사하시고 더욱 충성스러운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심으로 승리를 쟁취하시며 살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을 사는 동안 때로는 슬프거나 기쁜 날, 때로는 곤하거나 잔치 날, 때로는 차가운 겨울이거나 따스한 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날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채우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지워 버리실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신 십자가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심을 믿습니까? 당신을 끝내 선하신 뜻대로 이끄실 것을 확신합니까?
아멘이십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 어떤 악한 환경과 조건 앞에서라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창조물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과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보내시며, 우리의 믿음의 몸짓들에 아빠의 관심과 사랑으로 반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둠의 밤이 깊다는 것은, 환경이 더 악해지고 절망스러운 것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질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절망이 클수록 더욱 간절히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비록 극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었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확신과 감사로 이웃을 위해 기꺼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복된 운명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이 험난한 세상을 감사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진을 계속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